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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敗戰)“ na kim 201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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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쓴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는 있어도 결국 불행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사람을 절망적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느끼는 절망의 수준에 따라 세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가장 위험한 절망의 상태로서 자신이 절망적 상황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박고 조롱하는 병정들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삶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장차 그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절망적 삶을 매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과 마약, 게임과 쾌락으로 자신의 절망을 위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과 성취에 자신의 절망을 묻어버립니다. 그는 행복의 깊숙한 곳, 이곳이야 말로 절망이 가장 편안하게 머무는 곳이다.”이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이 그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에 대해 처절하게 절망했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알지 못하는 절망적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보다 조금 나은 절망이 있습니다. ‘자신이 절망적 상황에 있음을 깨달아서 얻는 절망입니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다만 그들은 그 절망의 이유를 외적인 세상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철학을 하고 종교를 만들며 학문을 통해서 절망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거기서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하면서 좀 더 나은 자신,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보려고 애쓰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합니다. 마음을 헤집고 본성을 분석하고 욕망과 이성까지 부정해보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결국 소망 없음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수준을 넘어서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희망의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왜 절망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정확하게 압니다. 스스로 어떤 희망의 가능성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절망은 신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왔습니다. 사람은 이 단절의 상태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신과의 관계의 단절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회복의 자격과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의 반대말을 희망이 아닌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할 때,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비로소 절망을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칼빈은 개혁주의 신학의 뼈대를 세우면서 이 말을 전적인 타락무조건적 선택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람의 절망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처절한 절망, 그 절망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답입니다.

 

고난의 한 주간을 보냅니다. 저는 이 한 주간을 패배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죄와 악에 대하여 완전하고 처절하게 패배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나 자신에게, 사람에게 그 어떤 가능성도, 소망도 없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로소 우리 자신에 대해 참된 절망을 배우게 되고, 그 절망을 넘어서는 신앙의 필요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 중에 났고, 죄악으로 살며, 죄악의 조롱거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인생의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패배했습니다. 우리가 패전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조차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외롭게 죽임당하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랍니다. 더 겸손하겠습니다. 더 엎드리겠습니다. 더욱 낮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나를 맡기고 성령 하나님 의지하여 살겠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한 주간을 보내면서, 패배와 죽음의 한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고백이자 결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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