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로새서 - 2.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
- na kim 2017.1.20 조회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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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 골로새서 2017. 1. 3.
2.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골 1:13-23)
얼마 전에 소위 ‘다락방’이라는 교단에서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는 한 목회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때 다락방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위세가 대단했었습니다. 꽤 많은 교회가 ‘다락방 현상’으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다락방에 영향을 받은 성도 혹은 교회가 보이는 일반적인 현상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단 시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의 권위나 신론, 기독론 등에 대한 신학적 차이입니다. 하지만 사실 다락방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대단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락방’의 시작이 전도 훈련에 대한 강조와 방법론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논리에 따르지 않거나 같은 열심을 보이지 않는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를 영적으로 죽었다거나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여러 교단들이 제시했던 수많은 신학적인 이유보다 더 컸던 실질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다락방은 하나의 교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신학자들이 배출되고 다소 거칠고 정돈되지 않았던 신학적 입장이 일정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정리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과거에 교회를 공격하고 해롭게 했던 일에 대한 사과도 있었습니다. 여러 교단에서 다락방은 더 이상 이단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직 우리 교단(고신)을 비롯한 보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교단에서는 다락방을 이단으로부터 해제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초대 교회는 여러 가지 이단사상으로 크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유대주의와 헬라의 철학은 한편으로는 교회의 신학적 논리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이단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그중에 ‘영지주의(Gnosticism)’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영지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사도 바울이 그들에 대해 교회를 어떤 논리로 보호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영지주의란?
골로새서 2:1에 의하면 바울은 골로새에 직접 가서 교회를 세우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인 에바브라의 고향이 골로새였습니다. 에바브라는 복음의 메세지를 고향으로 들고 갔습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 골로새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7, 4:12-13) 또한 빌레몬서의 주인공인 빌레몬의 집도 골로새에 있었고(골 4:9) 많은 성경 학자들은 골로새 교회가 당시 귀족이었던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옥중에 있던 바울은 제자 에바브라로부터 골로새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유대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발전된 논리로 초대교회를 괴롭힌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안다’는 뜻의 ‘gnosis’라는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것들에 대한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교리는 복음고 유대인의 율법주의, 그리고 헬라의 철학을 혼합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몸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은 악하므로 하나님은 물질인 몸을 입고 오실 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함으로 신성까지 부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영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들의 논리 중 가장 독특한 것은 ‘유출’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연속적인 유출’로 봤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신성이 영적인 존재에 유출된 것이며 예수 또한 하나님의 신성이 좀 많이 유출된 존재에 불과하다고 봤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신성의 유출’의 복잡한 단계가 있으며 예수는 그 중 낮은 신성을 가진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온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교리로 생각했고 영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신들에게 있어서 육체적이 쾌락이나 방종은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충만’ 혹은 ‘온전함’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은 세상의 많은 지식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함으로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하나님은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논리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바울에게 골로새서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지난 주에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1/4정도가 비슷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했습니다. 두 성경은 모두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이 두 교회에 비슷한 말씀을 전했을까요? 그것은 두 교회가 처한 상황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교회는 모두 이단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주로 괴롭히던 이단은 유대주의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과 전통을 강조하면서 이방인들이 모이는 교회로부터 그들의 혈통적 순수성을 분리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가르쳤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뉘어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은혜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에 등장하는 이단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여호와는 열등한 하나님에 불과했고 그 은혜로 구원을 얻기에는 불충분했습니다. 그들에게 또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고등의 신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지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이단의 주장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가르침으로 물리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충만한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골로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충만한 은혜(1:13-23)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충만한 은혜를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서술합니다.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충만하신 은혜(1:13-14)
바울은 13-14절에서 분명히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아들’(14)로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그 아들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을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7을 보십시오. 바울은 같은 말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창조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충만하신 은혜(1:15-17)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속적으로 조금씩 ‘유출’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에는 하나님을 아는 신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신성이 다소 많이 유출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온전한 신으로서의 권위와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He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정확한 재생산’을 의미합니다. 일부가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원본과 일치하는 형상,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원본 자체가 형상화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 15절 하반절에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라는 말씀에서 ‘먼저’라는 말은 시간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창조된 분, 즉 피조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서의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16-17절에서는 15절의 이러한 맥락을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의 사역을 설명합니다. 1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만물은 그 안에 함께 섰습니다.” 예수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고 예수 안에서 만물이 구속함을 받습니다. 예수는 구속과 창조에 대하여 충분하고 온전한 권위와 은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충만하신 은혜(1:18-23)
바울은 18-23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파합니다. 18절을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는 만물의 근본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난 자, 즉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는 만물의 으뜸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로 충분한 것입니다. 다른 길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21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케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교회의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 십자가의 영광이 없는 교회, 말씀이 육신이 되는 영적 경험이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1-23절은 교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과거에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21).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22). 하나님은 미래에 교회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뜻은 어떻게 이뤄집니까? 23절을 봅시다.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약속과 경고의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은혜가 주어지지만 그 약속을 버리는 사람에게는 징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일군이 되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마지막에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먼저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것입니다. 천하 만민에게 고르게 동일한 복음이 선포됩니다.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요 왕이십니다. 어느 민족도 이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말씀이나 이익도 바울을 흔들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일군이 되어 모든 고난과 고통을 기쁨으로 여기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일군의 자리에 우리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만히 눈을 감고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여주고 있는 영적인 이미지를 하나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품고 있습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이 곧 자신이요 자신이 곧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죽이는 원수가 있습니다. 아들은 바로 그 원수 때문에 죽임 당할 것입니다. 아들이 그들을 품고 있습니다. 아들이 머리되고 그들은 몸이 됩니다. 아들 안에 그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 아들이 그들처럼 되어 함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안에 있는 원수’, ‘원수를 품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골로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이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된 우리들을 위해서 아들을 주셨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 은혜가 보이십니까? 그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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