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1. 미스터 선샤인 | 김나래 | 2022-09-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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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 교회사 특강 32 2022. 9. 7.
한국교회사 - 1. 미스터 선샤인(행 1:6-8) 찬송가 : 543. 어려운 일 당할 때 [(구)342장] / 538.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구)327장] 기독교 역사 전시관에 소개된 한국 교회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 선교의 놀라운 특징은 ‘선교사보다 복음이 먼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1866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는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조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당시 셔먼호 선장이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해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죽기 직전 성경이 들어있는 작은 보따리를 박춘권이란 졸병에게 건네게 됩니다. 1899년,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지 33년이 지난 이 때 마펫 선교사 앞에서 한 남자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으로 건넨 그 한 권의 성경이 한 영혼을 살린 것입니다.
조선으로 향했던 토마스 선교사의 발걸음은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를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가져가 여관 벽을 도배하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관에 묵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그 중 홍신길은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됐으며,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인이었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장로가 됐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 특히 박영식은 자신의 집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으로 내놓게 됩니다. 이렇듯 조선은 선교사보다 먼저 복음을 접하고, 또 복음으로 준비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교의 역사가 이렇게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는 않습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시작을 서양과의 접촉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면, 그 현실을 잘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구한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한 조선인 청년과 의병활동을 하며 빼앗긴 조국을 회복하고자하는 한 여성의 사랑을 그린, 2018년에 방영된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1871년 6월 11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한국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부릅니다. 이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겠습니다. 1. 제너럴 셔먼호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웨일즈 출신으로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신학교과정을 마치고 목사로 안수 받은 후 해외 선교 사역에 뜻을 품었습니다. 그는 아시아 선교에 비전을 가지고 아내 케롤라인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임신했던 아내는 유산에 이어 사망합니다. 그는 한동안 충격에 빠졌으나 중국에서 조선인 카톨릭 신자를 만난 것을 계기로 1865년 조선으로 건너와서 4개월 정도 포교활동을 합니다. 활동하던 배가 좌초되어 잠시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1866년 미국의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항해사 겸 통역사로 탑승합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진입했고 막무가내로 통상화 무역을 요청합니다. 당시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던 조선관원들에 의해 요청이 거절되자 그들은 조선 관원을 포로로 잡아갔고, 통상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노한 평양 관민들이 강변에 몰려들었고, 제너럴 셔먼호는 소통과 대포를 쏘며 진압하려고 했습니다.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변의 모래톱에 좌초되었고,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는 대동강물이 기름을 풀어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토마스 선교사를 포함한 5명의 서양인과 14명의 중국인, 말레이시아 선원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작은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군대보다 더 성능이 좋은 화포와 총으로 무장하고 통상 교역을 압박하며 전쟁에 가까운 상황으로 몰고 갔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 말기 통상을 목적으로 하는 서양의 상선들이 많았고, 순조, 헌종, 철종 시대부터 여러 차례 보고되었지만,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으로 통상은 거부하되 잘 달래보냈기에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제너럴 셔먼호가 문제가 된 것은 이들이 통상요구가 거절당하자 해적으로 돌변했기 때문이고, 한 나라의 군대와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사에서 첫 순교자로 칭송되는 토마스 선교사의 애초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선교를 원했을까요? 강압적 통상을 원했을까요? 그의 선택과 그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2. 토마스 선교사의 선택 조선 말기 작은 나라 조선은 중국이라는 큰 세계관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수천 년 ‘왜’(倭)라고 부르며 멸시하던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세계관이 무너지고 국가적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쇄국정책이 강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방과 개혁의 요구가 빗발쳤습니다. 반면 서양의 입장에서는 조선은 아직 열리지 않은 신비한 국가였습니다. 선교적으로도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청년 선교사들이 조선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는 것은 당연한 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제너럴 셔먼호가 보여주는 현실을 그렇게 쉽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 선교사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과연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 교회의 첫 순교자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의 선교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865년에 있었던 토마스의 첫 조선 선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는 1865년 9월 13일 조선 연평도에 들어왔고, 한문 성경을 보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하 교회화되어었던 가톨릭 신도들의 도움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4달의 포교활동 후 1866년 1월 중국으로 돌아갔고, 4월에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났는데, 그들이 뜻밖에 자신이 전했던 한문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힘을 얻어서 다시 조선으로 들어올 계획을 세웁니다. 그때 만났던 배가 제너럴 셔먼호였습니다. 작은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는 동양의 한 신비한 나라와 교역을 하려고 했고, 위험에 대비하여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통역을 위해 토마스 선교사를 고용하게 됩니다. 그가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아내와 자녀를 잃으면서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선교의 중심을 읽고 인정할 때 그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교역을 거절하는 국가의 공권력을 무력으로 무너뜨리려고 했고, 행정관리를 구금했으며 자신들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해적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 배의 한 구성원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가 전했던 성경이 어떻게 여러 사람을 변화시켰고,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구전으로 전했던 이야기들이 토마스 선교사를 미화하는 과정에서 정사처럼 포장되었을 뿐입니다. 그는 침략을 한 것일까요? 선교를 한 것일까요?
3. 문화와 선교 한 나라가 가진 문화와 역사는 때로 복음과 충돌하기도 하고 때로 복음에 융화되기도 합니다. 나이지리아에서 있던 한 선교사의 경험은 문화와 선교의 갈등에 대한 좋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이지리아의 하우사 부족은 장례을 할 때 죽은 사람의 관을 여러 사람이 함께 어깨에 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들 부족을 선교하기 위해 함께 살기 시작했던 한 선교사가 어느 날 어느 날 자신의 정원에서 아들을 목말을 태워 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하우사 부족은 선교사가 자신의 아들을 너무 미워해서 죽이려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와 그가 전하는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문화와 역사에 대한 존중이 없는 선교는 실패를 전제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시아 여러 나라와 인디언 선교 등에서 그 사례를 잘 보고 있습니다. 인류학자인 찰스 크래프트는 “문화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개인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유지할 것을 요구 받는 사회적 유산이며,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밑그림, 또는 생존을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정의했고, 선교학자이며 문화인류학자인 폴 히버트는 “문화란 다소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룹에 소속된 사람들이 공유하며, 그들의 상징체계를 사용하여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통합된 믿음, 느낌, 가치, 그리고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모든 문화 행위는 습관적인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문화의 영향 아래서 습관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문화는 학습되는 것으로서 부모나 문화를 배우게 되는 사람들로부터 전수받는 것이며, 흉내와 전수라는 효과적인 과정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1978년 로잔 복음화 대회에서 발표한 복음과 문화에 대한 보고서에는 문화의 기원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창조 언약(창 1:26-28)으로부터 설명합니다. 선교학자인 탐 스톨터는 문화와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 “진정한 기독교에서 초문화적 진리는 문화적 표현을 찾아야 하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국적, 혼합적, 혹은 양분됨이 없이 그 문화와 얽힌 수용적 상황에서 성육신적이어야 한다..... 문화는 진리에 영향을 미치는 한편, 진리도 역시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절대적인 것들이 성서적인 진리를 넘어가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성서적 진리는 문화적으로 적절한 표현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류가 만들어내는 모든 문화는 존중받아야 하며, 그 속에 일정한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지역과 인종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우월한 지위와 가치를 가지고 다른 문화를 말살하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선한 목적을 가진다고 해도 인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교회가 돌아보는 선교의 역사에서 타문화권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 결과는 인류의 역사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기독교 선교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가진 지역들은 선교사들과 그들을 파송한 교회의 의도와 헌신의 정도와 관계없이 그들이 최초에 강제당했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4. 땅의 끝까지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회에게 끝의 끝까지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우리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생각합시다. 한 때 우리의 조상들은 땅의 끝이었습니다. 복음의 영향을 받지 못했었고, 이질적인 문화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아시아의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복음과 교회에 대하여 열린 나라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약 8주간 수요 예배를 통해서 그 이유와 뜻을 살피려고 합니다. 다만 오늘날 복음과 선교의 땅 끝에서 땅의 중심으로 변화된 지금 혹시 우리는 과거에 세계교회가 범했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문화와 문명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이 그들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변화시켜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지지할 수 있지만 그들의 문화와 생활의 습관이 우리의 선교의 대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더 잘 살게, 윤택하게, 풍요롭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살도록 인도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도록 돕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복음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도 함께 순종하면서 선교의 사명에 동참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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