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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3. 예수, 우리의 이웃 - 3. 눈물병 이응도 목사 201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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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룻기 119-22절 말씀

* 제 목 : 예수, 우리의 이웃 - 3. 눈물병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육체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눈물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뻐도 눈물을 흘리고 고마워도 눈물을 흘립니다. 슬퍼도, 억울하고 분해도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이 그리워도 눈물을 흘리고, 미워도 눈물을 흘립니다. 감격하고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고, 불쌍하고 측은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어쩌면 눈물은 사람의 마음을 씻고 삶을 정화시키는 거룩한 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56편을 보면 시인은 참 어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모함하고 억울하게 압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는 자기 앞에 다가온 고난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훌륭한 신앙적 결단이요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반응하기로 결정해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람들의 악함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이 압제 당하는 이유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눈물을 흘립니다. 영적인 의지를 사용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억울함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해도 눈에 보이는 그들의 위협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려 해도 그들을 보면 분노가 일고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56:8)”

 

저는 시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이 구절을 택하겠습니다. 제게는 이렇게 읽힙니다. “하나님, 내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고통당하는지 알지 않습니까?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주님의 눈물병에 담아주십시오. 내 마음에 흐르는 눈물을 주님의 마음에 채워주십시오. 내가 흘리는 모든 눈물의 이유를 주님의 책에 기록해주십시오. 내가 주님께 나의 눈물을 드리고, 오늘의 고난을 이겨나가겠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며 고난의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지께서 강단에서 중얼중얼 노래하면서 기도하시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제가 아들 가일이만 하던 시절, 아버지는 지금 저의 나이셨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께서 기도하면서 부르시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버지는 강단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노래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아시지요? 내 사정을... 아시지요? 주님...” 아마도 교회를 개척하시고 참 어려운 시절을 지나가면서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간절한 도움을 구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제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보니...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다 보니 그 마음과 노래가 이해가 됩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시편 56편을 노래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시편 56편에서 눈물은 하나님과 시인을 잇는 강물입니다. 시인은 그 눈물의 강에 자신의 모든 아픔과 서러움을 실어서 하나님께 띄워 보냅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강을 통해 흘러온 시인의 아픈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아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눈물의 강을 정의와 사랑의 바다로 변화시키시고, 시인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진 모든 눈물어린 사연들이 절절히 감사와 찬양으로 드려질 것입니다. 시인은 그 믿음 붙들고 오늘도 눈물의 기도와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56편의 마지막에 이렇게 찬송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56:10-13)

 

성도 여러분! 이런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까? 이런 기도드린 적이 있습니까?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주님은 그 눈물로 우리를 씻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형통하게 이뤄지는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 필요와 욕구에 따르는 삶

 

우리가 본문을 통해 만나는 이 가정은 그 등장이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패기만만한 선택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고향땅 베들레헴에 흉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방의 땅을 선택하기로 결정합니다. 아마도 자신만만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있으면 어디서 무엇을 해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이 가정이 약속의 땅, 고향 땅 베들레헴을 떠나서 그들의 필요와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모압 땅을 선택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필요와 욕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잘못인가요? 범죄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아닐지라도, 딱히 잘못된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고 있고, 욕구가 만족될 때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필요와 욕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은 언젠가 벽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필요와 욕구는 이 세상에서 다 채울 수 없는 것이고, 늘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욕구에 쉽게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들은 때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사건을 만나게 되고, 우리의 모든 필요와 욕구가 거절되는 엄청난 현실을 맞기도 합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시대로부터 약 1100년이 지난 후, 갈릴리 부근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에서 자란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삶에서 그 어떤 문제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범죄한 일이 없고, 그들은 악한 사람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자 청년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고 있었고, 여자 청년은 가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다가옵니다. 아기가 생긴 것입니다. 아직 정혼자를 품지 않았는데, 정혼녀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2. 눈물 흘리는 삶

 

성경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성경의 상황 속에 자신을 넣어보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상황 속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을까?”라고 가정해보는 것은 그것이 진리는 아닐지라도 성경을 사실감 있게 이해하게 만들어줍니다. , 생각해보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 여자 청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들의 행복을 따라 살아가던 그들에게 선뜻 다가온 하나님의 계획 앞에 그들은 어떤 생각과 선택을 했을까요?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멘붕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행복만을 꿈꾸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에 그들은 절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다가왔을까.... 왜 하필이면 우리들일까....?” 그들은 셀 수도 없는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고, 고민했을 것이고, 원망했을 것이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눈물 없이 그 시간을 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갈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의 삶에 암울한 어둠이 덮친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눈 앞에 놓인 분명한 삶의 필요를 전혀 채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저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 앉아 목놓아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앞뒤를 재어 보아도 어느 한쪽에도 희망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절망합니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눈물조차 말라버리는 처절한 절망이 나오미의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울음조차 울 수 없고, 눈물조차 말라버리는 절망을 만난 일이 있습니까?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앞으로 그런 절망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 눈물로 성도가 되어가는 삶

 

절망으로 마른 울음을 울던 나오미가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두 자부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13) 세여인은 목 놓아서 웁니다. 우리는 이 울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아기들은 본능적으로 웁니다. 우는 것은 그들의 대화의 방식입니다. 조금 자라면 욕구 중심적으로 웁니다. 채워지지 않으면 울고 가질 수 없으면 웁니다. 감각적으로 울기도 합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슬픔을 압니다. 얼마 전에 저는 한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36세의 젊은 아빠가 과로와 심장마비로 소천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모든 사람들을 가슴 깊이 울린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젊은 아빠에게는 쌍둥이 형이 있었습니다. 동생이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돌이 되지 않은 아들이 아빠와 아빠의 형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아빠가 몇 일만에 온 줄 알고 그 아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형제의 아들이 형에게 매달려서 칭얼대고 어리광부리는 것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울었습니다. 가슴 깊이 울었습니다. 이유가 있는 울음 - 이것이 성인의 울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울음이 있습니다. 바로 성도의 울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울음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일이 있구나를 깨달았을 때 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일이 있다고 판단할 때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후회의 눈물, 회개의 눈물, 돌이킴의 눈물.... 이 눈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성도가 진정한 회복을 말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자부들과 웁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슬픈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이 울음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재산을 상속받아서 먼 나라로 떠났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하고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마도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배고픔과 수치에 울었을 것이고, 억울하고 분해서 울었을 것이고, 두렵고 외로워서 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가장 가치있는 울음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며 우는 울음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우는 울음 - 비로소 그의 삶에 소망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울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4. 눈물로 약속의 싹을 틔우는 삶

 

마리아와 요셉 - 여러분이 이 어린 정혼자들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참으로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힘들고 두려워서 울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놀라고, 그 뜻 감당하기에 너무 힘들어서 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면 그들의 울음은 아직 성도의 울음이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각각 천사가 나타났고, 그들은 아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었습니다. 자신들에 삶에 찾아온 거룩한 하나님의 뜻, 그들은 그 뜻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기로 결정합니다. 다만 그들의 마음에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 그들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였고 성도요 교회입니다.

 

나오미는 눈물을 흘리며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큰 자부 오르바는 고향으로 갔지만 작은 자부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먼 길을 왔습니다. 이들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이들에게는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희망이 있었습니다. 너무 작고 희미한 것처럼 보이는 희망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지도 않던 사사시대의 마지막 때에 300년 전 출애굽할 때 하나님이 주셨던 법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법은 바로 기업을 무를 자' 즉 배우자와 아들을 잃은 나오미와 룻을 보호해줄 수 있는 법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눈물의 기도에 아무도 지키지 않고 있던 그 법을 놓습니다. 마치 그것은 유리 접시에 솜을 깔고 물을 적신 다음에 콩을 놓는 것과 같습니다. 유리 접시와 솜만으로는 안됩니다. 촉촉하게 물어 솜을 적시고 있어야 비로소 콩에 싹이 돋는 것처럼 성도의 눈물이 있어야 하나님의 약속이 성도의 삶에 싹을 틔웁니다. 나오미와 룻은 눈물의 시대를 보냅니다. 언약을 바라보며,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심고 하나님의 때를 눈물로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2013년의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을 성탄의 눈물과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 흘렸던 마리아와 요셉의 눈물을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의 뜻 - 그들은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과 눈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눈물의 유리병 속에서 싹이 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눈물 없이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참 힘이 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탄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룻과 나오미의 고난의 여정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들, 눈물을 흘리며 믿음의 길을 따르는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약속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잎이 움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2000년 전의 성탄의 눈물 젖은 기쁨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고, 하나님의 약속에 꽃이 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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