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감사 주일 - 예배하는 사람들 | na kim | 2015-1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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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22. 추수 감사주일 * 본 문 : 창세기 4장 1-5절 * 제 목 : 예배하는 사람들 지난 주간 ‘시사 매거진 2580’ 이라는 프로그램이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3년 전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가까운 곳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했던 한 목회자가 받았던 전별금에 대해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목회자는 10년 정도 섬겼던 교회를 사임하면서 약 13억원이 넘는 전별금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별금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교회에 기여한 것에 있어서 그 돈이 적으면 적었지 많다고 생각은 안 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조용기 목사가 전별금으로 받았던 200억, 김창인 목사가 받으려했던 30억... 등을 함께 언급하면서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의 공을 인정해서 그 정도의 전별금을 주는 것이 한국 교회의 관행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부분에 동의하십니까? 물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서 의리도 있고,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고 헌신했던 목회자가 사임하게 될 경우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우를 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도된 일부 대형 교회들의 관행은 상식을 뛰어넘었습니다. 옳지 않은 관행이고, 넘치는 배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모여 예배하고 흩어져서 삶으로 예배합니다. 교회로 모인 우리들은 보다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각각 다른 모습으로 수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섬김의 모습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역자의 모습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희생과 헌신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와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의 예배에 특별한 보상을 받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배란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배를 좀 더 잘 드렸다고 해서 누군가가 이 땅에서 더 많은 보상과 대가를 바란다면... 그런 것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에서 교회를 질타합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이 땅에서 모든 영광과 보상을 다 누리려고 하는 것 아니냐! 열심히 일하고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보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사업이지 예배가 아니지 않으냐!” 1. 두 사람의 예배 오늘 우리는 예배하는 두 사람, 가인과 아벨을 만납니다. 그들은 양을 쳤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었던 가인은 땅의 열매를, 양을 쳤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드렸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나무랄 것 없는 좋은 일입니다. 비록 그들의 부모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인생에 고통과 고난이 시작되었지만 그들은 부모로부터 하나님을 배우고 예배를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최초의 부모였던 아담과 하와는 과연 얼마나 좋은 부모였을까요? 먼저 그들은 좀 미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고, 원죄의 무거운 짐을 자녀들에게 안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잘 한 것도 있습니다. 적어도 아담과 하와는 자녀들에게 예배를 가르치고 전승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인 가인과 아벨은 노동했고, 소득을 얻었고,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능하며 예배의 시간에 자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 세대를 통해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좋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먼저 우리는 성경의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예배의 행위보다 예배자의 삶과 인격을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인류가 드렸던 첫 예배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건물에서 얼마나 많은 수가 모여서 얼마나 많은 헌금을 하고 얼마나 화려한 찬양을 하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삶을, 예배자의 인격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자의 삶과 인격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저는 성경이 우리들에게 두 가지 힌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받으신 이유 vs. 거절하신 이유 먼저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자에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 11:4) 여기서 우리는 아벨이 믿음으로 예배를 준비했고, 더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좋은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어떤 제사를 드렸고, 왜 거절당했을까요? 창세기 4장 7절을 봅시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 4:7) 가인이 자신과 제물이 거절당하자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분노에 대해 주신 말씀입니다. NIV 성경에는 이 부분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But if you do not do what is right, sin is crouching at your door; it desires to have you, but you must master it."(Gen 4:7) 가인과 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으로 설명됩니까?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네가 의로운 일을 했다면, 의로운 삶을 살았다면 왜 너와 너의 제사를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겠는가? 라는 말씀입니다. 반면 "if you do not do what is right, sin is crouching at your door." 네가 의로운 일을 하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았을 때 죄는 너의 문 앞에 엎드려 있다고 했습니다. ‘sin is crouching’이 현재 진행시제를 사용한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공격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죄가 가인에게 공격성을 드러낼까요? "It desires to have you!"라고 했습니다. 죄가 가인을 소유하기를 강력하게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죄의 노예가 되는 삶을 선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죄는 늘 사람의 삶의 문 앞에 엎드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이것을 번역하되 ‘죄의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가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성경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죄의 소원이 그를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죄의 소원에 사로잡힐 수 있을까요? 지금 제사를 드리는데... 그럴 수도 있을까요? 성경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3. 예배의 실패, 삶의 실패 창세기 4장은 예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인류 최초의 살인이라는 엄청난 범죄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가 동생을 죽이는 엄청난 죄와 악의 모티브가 된다는 사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인이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결과는 범죄였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오히려 큰 징계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사울왕입니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예배했고, 승리하고 난 다음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배의 결과로 왕권을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예배에 대한 그의 이해와 중심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장면은 삼상 15:30의 말씀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삼상 15:30) 여기서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사울왕의 예배의 중심은 ‘나를 높이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예배를 통한 소원은 자신의 권력과 영광에 있었습니다. 예배의 열매가 자신의 권력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사울이 예배하기를 원했던 이유이자 동기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와 예배를 거절했고, 그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약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헌신의 동기를 정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바나바가 헌신하는 것과 성도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같이 존경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일부를 감추고 일부만 드렸습니다. 원하는 것이 바라바와 같은 존경과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진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된 소원이 만드는 헌신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 대한 베드로의 표현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가인하게 하셨던 말씀과 비교해보십시오. 죄가 문 앞에 엎드려서 가인을 호시탐탐 노린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죄가 가인을 잡아먹습니다. 죄가 그를 콘트롤합니다. 행 5:3-4절에서 아나니아 또한 그렇습니다. 사탄이 문 앞에 엎드린 정도가 아니라 그 마음에 이미 가득 들어왔습니다. 그는 사탄이 주장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을 속입니다. 하나님께 거짓말을 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말입니까? 예배를 통해서, 헌신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왜 성경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할까요? 초대교회에는 잘못된 소원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신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빌립보서 1장 15,17절의 말씀입니다.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도 바울을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순전하지 못한 동기로 열심을 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소원은 불의한 삶을 만들고, 불의한 삶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를 만들고, 예배가 없는 삶은 죄와 악의 열매를 만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잘못된 소원을 만날 때 그 결과는 이렇게 비참합니다. 예배는 거절되고, 교회는 분열되고, 성도의 삶은 무너집니다. 4. 감사로 드리는 예배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인데, 말씀의 주제가 좀 무겁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사로 예배하는 주일에 반드시 기억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의 삶과 마음의 중심에 관한 것입니다. 예배하는 우리들은 어떤 소원, 어떤 내면의 동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고 계십니까? 우리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성공하고 있습니까? 제가 지난 번에 소개한 적이 있는 본 회퍼를 글 하나를 다시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귐보다도 사귐에 대한 자기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본래의 뜻하는 바가 정직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의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생각하고 사람들이 그의 꿈에 복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을 그는 실패라고 말합니다. 그의 꿈이 부서지면 사귐은 깨어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형제를 비난하다가 하나님을 비난하는 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절망 상태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사귀는 생활로 들어갈 때 요구하는 자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받는 자로서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목회자로 여러분과 교회와 하나님을 섬길 때 제 마음의 중심에 있는 거울 하나가 바로 이 말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목회자로서의 나의 꿈을 이루려는 것은 아닌가? 예배를 통해서 나의 성취와 만족을 구하는 것은 아닌가? 거룩한 말로 포장된 나의 욕망이 예배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감사도 없고 진실함도 없는 예배를 드리면서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을 나를 위해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진실함으로, 나 자신의 삶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인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창 4:7을 다시 봅시다. “.... sin is crouching at your door; it desires to have you, but you must master it."(Gen 4:7)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죄가 문 앞에 엎드리고 있다가 우리를 소유하려고 한다고 ?습니다. 그러나, But!!!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명령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악한 사람들입니다. 너무 쉽게 예배의 중심을 빼앗기고 감사를 빼앗깁니다. 죄와 악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줍니다. 이기심과 교만에 마음을 풀어놓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의 소원과 만족과 영광을 이루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But, you must master it!" KJV에서는 이것을 “thou shalt rule over him.”이라고 했습니다. 죄와 악의 소욕이 우는 사자와 같이 너희를 삼키려고 으르릉 댈지라도 너희는 말씀으로, 성령으로, 하나님을 거룩하게 예배함으로 그 소원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하는 중심으로 죄와 악의 소원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추수 감사주일에 우리의 예배에 대해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 하나님의 중심과 우리의 중심이 감사함으로 만나는 참된 예배가 있는 초대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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