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찬양에 대한 생각/최용덕| | 현민 | 2012-11-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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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간사님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여러가지가 아주 명료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여쭐까요? 거제도 2층집 베란다에서 저희 딸이 사람들 앞에서 한 일이 무엇이지요? 이제는 금방 대답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빠에 대한 찬양 (讚揚, praise)였습니다. "이 신발 우리 아빠가 고쳐줬어. 우리 아빠가 최고야! 우리 아빠는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뭐든지 다 고칠 수 있어." 이게 무엇입니까? 바로 '찬양'입니다. 이게 바로 찬미요 찬송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찬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누군가 그렇게 제안한다면 이제 바로 여러분의 입으로 정말 찬양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 연재의 제일 첫 회를 기억해 보십시오. 서 울 어느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강사인 제 앞에서 20분 가까이나 소리쳐 떠들며 자신들의 전도 사님을 자랑하고 칭찬했던 그 일과 그 내용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떤 대상에 대한 '찬양'이요 찬양의 '내용'입니다.
어떤 대상(인격체)에 대한 찬양은 그 대상의 능력과 성품과 업적 등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그것을 선포하거나 격찬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찬양'에는 왜 무엇 때문에 찬양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자,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라고 부르는 노래들 가운데는 이러한 가사들로만 이루어진 노래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찬양, 찬양. 오, 주님을 찬양합니다. 소리높여, 손 뼉치며, 춤추어 찬양합니다. 정성을 다해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놀라지 마십시오. 엄밀히 말해(그렇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가사만으로는 진정한 '찬양' 일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저의 생일날 [낮해밤달] 독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일어나 "우리 이 시간 최용덕 간사님 칭찬 좀 합시다. 돌아가면서"라고 제안했고 다들 환호로 동의했습니다. 광주에서 온 한 자매가 일어나 외쳤습니다. "오,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신 최용덕씨 당신을 진정으로 칭찬하고 자랑합니다. 우리 다 함께 최 용덕씨를 칭송합시다." 그리고는 그녀가 앉자 대구서 온 한 형제가 기타반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 최용덕씨. 당신을 칭찬합니다. 소리 높여, 손뼉치며 당신을 칭찬합니다. 칭찬, 칭찬, 격찬, 자랑, 아..." 그가 앉자 이번엔 부산서 온 자매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습니다. "오, 최.용.덕. 이 시간 우리가 모여 당신을 칭찬하노라. 신령과 진정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대 를 칭송하노라. 아, 최.용.덕. 다함게 칭찬, 칭찬!" 그쯤 되면 최용덕이 머리가 열을 받지 않겠습니까?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람들에게 이 렇게 외쳐댈 것입니다.
"아 이보시오들! 나를 칭찬한다고 했으면 칭찬을 해야 할 것 아니오? 왜 칭찬은 안 하고 자꾸 엉뚱한 소리들만 하고 있는거요? 칭찬을 한댔으면 칭찬을 하시오. 구체적으로 말이오.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다는 것이오? 도대체 무엇을 칭찬하겠다는 것이오? 앙? 최용덕이는 잘생겼다든지, 키가 크고 우람하다든지, 똑똑하다든지, 뭘 잘 한다든지(*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네) 좀 설명을 해야 될 것 아니냐는 말이오!" 여러분, 이해가 되시는가요?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모여 놓고는 정작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어떤 능력과 어떤 업적을 찬양(격찬, 자랑, 칭송)할 생각은 안하고 밤새도록 음악에 맞추어 "찬양 찬양"만 외쳐대고 가면 그게 진짜 '찬양'이냐는 말입니다. 심지어 '할렐루야'라는 말도 '여호와를 찬양하라'의 히브리어 문장이지 그 말 자체가 찬양의 내용인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으며 여러분이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것을 이야기하십시오. 그것을 하나님께 직접 고백해도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좋습니 다. 경험한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우면 외치십시오. 그거라고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켜 놓으셨는지 그 하나님께 대해 사람들에게 자랑하십 시오.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말로 하다가 부족하거든 그 내용에다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 하십시오. 아니면 그 내용을 그림이나 글로 표현하여 나누십시오. 말을 못하겠거든 그저 눈물과 환희의 미 소만으로도 족합니다. 그것이 진짜 '찬양'입니다. 성경이(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진짜 찬양입니다. "내 신발, 아빠가 고쳐줬어. 우리 아빠가 최고야! 우리 아빠는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뭐든지 다 고칠 수 있어!"
누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거든 32개월(만 두살 8개월)짜리 저희 딸이 사람들에게 자기 아빠(저)를 찬양하는 이상으로 찬양하십시오. 그 정도도 고백할게 없다면 당신은... 조금 문제가 있 는 크리스챤이겠군요. 하나님께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라면 또 모르겠지만.... 자, 보십시오. '찬양'은 음악만으로 표현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천만의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 한 찬양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만의 '독과점 품목'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아 닙니다.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글, 시, 가사)을 담아서 표현하는 또 하나의 수단일 따름 입니다.오히려 대부분의 찬양은 우리의 말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찬양사역자'라는 말은 그 사용 여부를 심각하게 논의해봐야 합니다. 오직 음악 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역자들만이 이 용어를 독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 용어 자체가 불합리한 합성어입니다. 세상에 '찬양사역(선교):Praise Mission'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찬양 (praise)은 mission 그 자체이지 mission의 방법(수단)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서 말하는 '찬양사역(선교)'의 '찬양'은 영어로 'music'밖에 될 수 없습니다. 선교의 방법에 있어 'music'은 music(음악)일 따름이지 그것이 곧 'praise'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라서 한국에서의 '찬양사역(자)'라는 말은 '기독교 음악사역(자)'로 바뀌어야 합니다. 주일저녁(오후)예배를 다들 '찬양예배'라고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는 글자 그대로 특별히 (다른 예배모임과는 달리) '하나님을 격찬하고 자랑하고 칭송(praise)하는' 예배를 뜻합니까? 아니 면 단지 '음악적인 요소가 더 많은' 예배 모임을 뜻하는 것입니까? 앞의 경우라면, 우와! 정말 굉 장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전교인이 한 마음이 되어 한시간 내내 시나 노래나 언어로, 온 몸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업적등을 소리높여 격찬하고 자랑한다면 정말 굉장한 모임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런 굉장한 예배를 주일 저녁에 드려서야 되겠습니까? 주일 낮 시간을 이렇게 해야지요.
그게 아니라 뒤의 경우라면, 그 예배 모임은 실제로는 '음악예배'가 아닌가요? 아니, 그나저나 그 예배가 음악예배가 맞긴 합니까? 노래를 서너 곡 더 부르고 구역별 특송(?)이나 가족창을 한 다고 그것이 곧 음악예배인가요? 정말 음악에배라면 예배의 모든 순서를 음악화 시키는 것입니 다. 기도도, 심지어 성도들에게 하는 멧시지나 권면, 격려도 음악(노래)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 입니다. 그러면 그 에배는 나름대로 또 다른 의미와 열매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설교자도 자신의 말을 최소화하고 전하려는 멧시지가 담긴 노래를 활용하게 됩니다. 때로는 한 곡의 성가 가 한 시간짜리 설교보다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줄 수도 있기에. 그러나 우리의 '찬양예배'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그냥 명칭만 거창하게(뭐가 그 속 에 있는 것처럼) '찬양예배'입니다. 그러니 이 용어도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나가면 우리 한국에서 '찬양'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쓰는 대부분의 경우가 다 걸려 듭니다. '찬양신학교'는 '하나님을 격찬하고 칭송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양성해 내는 신학 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많은 방법 가운데 특히 음악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 고 선교하는 음악 사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인가요? '찬양선교단, 찬양 경연대회' 등의 용어에 있 어서도 그 '찬양'이 'praise'인가요? 아니면 'music 혹은 song'이나 '성가'의 의미인가요? "다음은 찬양 한 곡 듣습니다. '주여 이 죄인이'라는 찬양으로, 이 찬양은 전용대 전도사님이 찬양했습니 다."라는 아나운서의 멘트는 '찬양'이라는 용어가 본질적인 의미로 정확하게 사용되었나요? 이 모든 경우가 자꾸만 '찬양'을 음악적인 것으로 국한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앞 에서 '찬양은, 하나님께 대해 구체적으로 자랑하고 격찬하는 것'이라고 설명드렸고 여러분도 동의 하셨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보십시오. 어떤 집사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저는 지난 주간에 재정적으로 이러이러한 큰 어려움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기적과 같은 방법으로 그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아, 멋지신 하나님!"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 옳습니다. 물론 오리지널 '찬양'이지요. 그것 말고 다른 말로 이런 것을 뭐라고 합니까? 맞추셨습니다. 이런 것을 바로 '간증'(干證;a confession)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또 한가지 중 요한 결론이 얻어졌습니다. [크리스챤의 간증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최고의 찬양행위입니다.] 다시말하면 크리스챤의 간증 그 자체가 가장 실제적인 찬양인 것입니다. 간증에는 '찬양'의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분이 내게 행하신 일과 능 력, 하나님께 대한 칭송과 감사, 사람들에게 하는 자랑 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 하나님 찬양, 찬양, 할렐루야, 찬양"이라며 4부 합창의 완벽한 하모니의 성가대와 초호화 일류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부르는 노래보다, 못배우고 미천한 한 서리집사의 눈물섞인 1 분짜리 간증이 진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양-진짜 찬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성가 대가 거창하게 불렀다고 그게 곧 찬양인 줄 안다면 큰 오산입니다. 성가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찬양은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산골 교회 할머니 집사님이 하나님께 드릴 수 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교파에선 주일예배 시간에(아니 모든 예배모임에서) 반드시 성도들의 '간증' 을 중요 순서로 집어 넣습니다. 간증은,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동행하시고 우리 개개인의 삶 가운데 깊이 개입하셔서 역사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생생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늘 이런 간증이 고백되어져야 하기도 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 서로간에도 이러한 살아있는 간증의 나눔은 절대 필요합니다. 간증은 서로를 격려하고, 기쁨과 감 격과 감사를 배가시키며, 한 사람의 성령충만함의 영적 에너지를 다른 연약한 성도들에게도 전이 (轉移)시키는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간증은 함께듣는 온 무리들로 하여금 동일한 뜨거움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케 합니다. 지난호의 [약송의 땅]이라는 저희의 간증을 일고 많 은 분들이 저희와 동일한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고백을 전해 왔습니다. 바로 그것 이 간증의 위력이자 열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에는 성도들 개개인의 살아있는 간증(진짜 찬양)이 없습니다. 아니, 있어도 그걸 나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예배와 모임에선 설교자의 일방적인 설교가 있을 뿐입니다. 교회가 대형화되어 갈수록 나눔은 점점 불가능해지고, 한쪽에선 일방적으로 외치고 한 쪽에선 내내 앉아서 듣기만 하고 있는 시스템에 모두가 아주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간증이라고 하면 흔히 무슨 큰 병을 앓다가 나았다거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이야기인 줄로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교회들이 신앙간증 문화(?)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비록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라도-를 성도들이 서로 나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작은 것에서도 감사하고 감 격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의 태도는 '전염'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고백이 많아질수록 언 제나 행복한 사람이요 행복한 가정이요 행복한 교회인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이 연재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제가 건강을 잃고 모든 사역을 중단한 채 산골에서 살고 있을 때 많은 분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조언을 주셨습니다. 그중에는 이 런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최선생, 당신의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디어디에 사는 아무개라는 의사를 찾아가 보시오. 한의사인데 아주 경험도 많고 진맥도 잘 하고 한약 처방에 탁월할 뿐만 아니라 침을 특히 잘 놓는다고 합디다. 꼭 그분께 가도록 하시오. 그가 최선생을 도와줄 것이오.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오."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와 아주 비슷한 방식의 조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선생, 당신이 안고 있는 영혼의 문제-죄와 죽음과 영생-를 해결하기를 원하시거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시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유일한 분이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 을 희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오. 그분은 당신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당신을 행복하게 하실 분이오. 그분은 믿을만한 분이라오. 그분께 곡 나아가시오. 그가 당신을 도와 주실거요." 이런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의 해결자를 소개하는 말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안에는 온통 그 해결자에 대한 격찬과 자랑과 신뢰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 다. 바로 찬양입니다. 찬미요 찬송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찬양'행위입니다. 복음을 소개하고 전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최대 최고의 '찬양(찬송, 찬미)'행 위입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예배당에 모여 "찬양, 찬양, 여호와를 찬양"하며 한 두 시간씩 목이 터져라 노래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실제저인 '찬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찬송,찬미)하는 노래-즉, 찬양가, 찬송가,찬미가'의 개념에는 이러한 가장 실제적인 찬양이 다 포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성도들이 개인적인 간증을 노래로 표현 한 것이나 복음을 소개하고 전하는 내용의 노래들은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을 찬양하 는 노래-찬양가, 찬송가, 찬미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위의 노래들이 무엇입니까? 순수한 의미에서의 '복음성가'가 아닌가요? 그러므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서로 대립되는, 전혀 다른 주제의 노래들인 양 말하는 것은 굉장한 오류입니다. 모든 '복음성가'는 '찬송가(찬양가, 찬미가)'의 핵심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그래 서 우리 교회의 공용 통일 [찬송가]안에 60%에 가까운 복음성가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복음성가들도 동일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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