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통에 대한 이해
1. 먼저 생각하기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2007년 김창동 감독이 김청준씨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고민과 분노, 그리고 그 해결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잠시 영화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신애라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잃습니다. 남편이 사고로 죽었고,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꿈도 접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유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아들 준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인생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빚에 쪼들리던 아들 준의 웅변학원 선생님은 신애가 돈이 많은 줄로 알고 준을 유괴해서 죽입니다. 결국 신애는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신애는 교회를 통해서 희망을 찾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해서 엉엉 울면서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게 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들의 죽음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아들을 죽인 학원 원장을 찾아가서 용서를 실천하려 합니다. 자신의 마지막 희망을 앗아간 악한 죄인, 그를 만나면서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고, 당신이 내 삶을 망쳐 놓을 수 없다고, 나는 아무리 망가져도 이렇게 당신을 용서할만한 사랑과 의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신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너무 평안한 표정으로 신애를 만났습니다. 그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신애를 오히려 위로합니다. 자신은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 하나님을 통해서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평안을 신애도 누리기를 원한다고 간증합니다. 신애는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한 심정으로 교도소를 나섭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분노를 직면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그저 슬퍼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운명이 계속 다가오는지, 왜 이럴 수 밖에 없는지, 왜 그저 당해야만 하는 것인지 그저 소리쳐 울기만 했습니다. 그저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분노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을 잃고도 용서할 수 있는 권리조차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아들을 죽인 죄인을 용서했다고 말하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전도했던 교회의 장로를 유혹해서 성관계를 가지면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푸른 하늘을 노려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봐… 보라구… 내가 네게 복수할거야… 보라구…” 그녀는 이해할 수 자신의 삶에 다가온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에 분노를 통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은 인간의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고통의 문제와 고통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분노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 연달아 밀려든다면, 저항할 수 없이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난이 연이어 다가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2. 주의해서 성경 읽기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의 고통의 원인을 무엇이라 설명하고 있을까요? 먼저 알 것은 인간의 고통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실 뿐입니다.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한 다섯 가지 관점을 나눠 봅시다.
1) 우리의 죄와 악 때문에
창세기 3:16-19 / ‘수고와 고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 조상이나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사무엘하 24장 / 다윗의 범죄와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민수기 14:18 / 조상의 범죄는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에스겔 18:2-4, 20 /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시는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
니까? 이 말씀은 위의 두 말씀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요?
3) 고통,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
하박국 1:13 / 하박국의 모든 질문을 한 단어로 줄이면 “어찌하여!”입니다. 왜 그
는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까요?
욥기 42:1-6 /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의 이유에 대한 욥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4) 성도를 정화하고 단련하기 위해
히브리서 12:5-7 / 히브리서에서 제시하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3:19 /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고통을 통한 구원을 위해
창세기 45:7-8 / 요셉은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53:3-6 / 어린 양의 모든 고통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베드로전서 2:24-25 / 예수님의 고통이 우리에 대하여 한 일은 무엇입니까?
3. 깊이 고민하기
고통에 대한 이상의 다섯 가지 해석 가운데 어느 견해가 가장 성경적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견해를 택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이 다섯 가지 견해가 모두 옳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어느 한 견해도 고통의 문제를 완전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견해들은 옳거나 틀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고, 어떤 사람은 부모의 잘못된 삶의 방식이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어떤 고난은 도무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어서 그저 눈물만 흘려야 하고 또 어떤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어떤 고난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 중 어떤 해석이 적당한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통거리에 압도되어 살아가느냐, 고통거리를 해결하면서 마음과 삶의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덤에 누워있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가슴 한편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은 나를 성숙시키고 단련시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나는 고통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을 딛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어진 인생의 길을 당당하게 걷고 있습니까? 나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고 사람과 등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이해하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우리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이유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자세인 것입니다.
Max Lucado 목사의 ‘깨어진 창을 통해 하나님 보기”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언젠가 그 마음의 창은 순백하리만큼 깨끗했다. 하나님의 모습도 또렷하게 보였다. 맑고 평화로운 날, 언덕이나 골짜기를 보듯이 하나님을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유리는 깨끗하고 창틀은 온전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고 계시는지 알고 있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의 창이 깨졌다. 고통의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서 우리 마음의 창을 깨버렸다. 고통의 돌멩이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사별일 수 있고, 이혼일 수 있고, 사고일 수 있고, 병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언젠가 고통의 돌멩이가 날아와서 우리 마음의 창을 산산조각 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돌멩이들이 날아온다는 사실이다.
그 돌멩이가 어떤 돌멩이이건 결과는 같다. 마음의 창은 계속해서 깨어진다. 마음의 창틀을 박살내고 유리창을 조각낸다. 그 깨어진 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 이전에는 그렇게 똑똑하게 보였던 하나님이 이제는 조각나 보이기 시작한다. 깨어진 조각들은 제각기 하나님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굴곡시켜 보여준다. 조각난 마음, 상처 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4. 내 삶에 적용하기
요한복음16장33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준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 이 본문은 짧지만 고통과 환란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성도는 세상에서 늘 환란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지만 성도는 고통을 혼자 겪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에 대해서 이기신 주님이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십니다. 셋째, 따라서 성도에게 궁극적으로 허락된 것은 고난이 아닌 그리스도의 승리요 평안입니다.
이 한 구절의 말씀에는 고통에 대한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진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며 고통에 대해 승리하는 모든 과정을 신실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그래서 클로델이라는 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치워버리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에 대해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모든 고통을 자신에게 채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따라서 고통은 인간의 삶에 피할 수 없는 한 과정입니다. 다만 성경은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함께 고민하며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겪는 환란과 고통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조각난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상처 많은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에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조각난 마음, 우리의 상처뿐인 인생,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인생 속에도 계십니다. 거울이 조각났다고 해서 거울에 비친 우리의 얼굴이 조각난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의 고통 많은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얼굴을 우리의 삶에 온전히 비추시며 날마다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과 더불어 날마다 동행하며 고통을 딛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가는 거룩하고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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