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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동의 무릎, 이만기의 손 na kim 201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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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동의 무릎, 이만기의 손

 

얼마 전에 우연히 강호동의 씨름 선수로서의 전성기 시절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통통하고 복스럽게 생긴 얼굴형에 찢어진 눈매, 더벅머리를 한 약관 스물의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연거푸 당시 씨름천하를 호령하던 이만기 선수와 만났습니다. 이만기 선수는 크지 않은 체구에 탁월한 기술로 인기와 돈을 끌어 모았던 당대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놀랍게도 강호동 선수는 이만기 선수를 제압합니다. 이만기 선수가 이기지 못했던 유일한 선수가 강호동 선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천하장사 결승전에서 다시 만납니다. 으아아아~~ 강호동 선수는 자신만의 세러머니를 하면서 등장합니다. 이만기 선수는 가사롭다는 듯 강호동 선수를 쳐다봅니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경기를 시작하려면 샅바를 잡아야 하고, 샅바를 잡으려면 두 선수가 무릎을 꿇어야하는데, 누구도 먼저 무릎 꿇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씨름판에 흐릅니다. 각 팀을 이끌던 감독들 또한 신경전을 펼쳤습니다.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이만기 선수가 강호동 선수의 고등학교 선배입니다. 10년 이상 차이가 납니다. 강호동 선수가 먼저 무릎을 꿇는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거나 자존심 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강호동 선수는 먼저 무릎을 주지 않습니다. 이만기 선수 또한 새까만 후배 앞에 무릎 꿇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심판은 결국 같이 무릎을 꿇게 하고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다시 천하장사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두 선수가 준결승에서 만났습니다. 종합전적 32... 이만기 선수가 종합전적에서 열세에 있는 유일한 선수가 강호동이었습니다. “으라차차차!!!” 강호동 선수가 팔을 벌리고 포효합니다. 이미 이만기 선수는 기분이 많이 상해있습니다. 경기가 시작됩니다. 불꽃이 튀었습니다.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다보니 어느새 두 사람이 서로의 샅바를 놓치게 됩니다. 이만기 선수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강호동 선수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밀어버렸습니다. 넘어진 이만기 선수가 어이없다는 듯 심판을 바라봅니다. 강호동 선수는 저편으로 가서 우아아아~~~~”포효합니다. 두 번째 판이 시작됩니다. 이만기 선수는 급한 마음에 먼저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강호동 선수가 빨리 경기에 임하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을 것처럼 하더니 다시 뒤로 돌아서 우와아아....”하고 소리를 칩니다. 이만기 선수의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강호동 선수가 샅바를 잡으려고 하자 이만기 선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깝치리 마라, XX!” 잠시 경기가 중단됩니다. 강호동 선수는 욕을 들어가면서 경기를 할 수 없다고 항의합니다. 감독도 항의합니다. 결국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감정을 콘트롤하지 못했던 이만기 선수는 쉽게 지고 맙니다. 넘어져 있는 이만기 선수에게 강호동 선수가 손을 내밉니다. 씨름판에서 흔히 있는 승자의 여유이자 패자의 인정입니다. 그런데 이만기 선수는 강호동 선수의 손을 뿌리칩니다. 그 이후 둘의 씨름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교회가 저의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입니다. 저는 교회로 생각하고 성도들과 함께 삽니다. 이렇게 좋은 직업, 이렇게 복된 환경, 이렇게 행복한 관계가 또 있을까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저의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이 말이 동의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합니다. 동의가 되는 이유는 당위에 있다면, 동의되지 않은 이유는 현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섬기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분, 하나님으로 설명되고 은혜로 유지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리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강호동 선수가 만일 자신의 무릎을 먼저 선배에게 내어줄 수 있었다면... 이만기 선수가 만일 자신을 이긴 후배의 손을 잡고 칭찬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씨름을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참 좋은 사람, 사랑받는 후배요 존경받는 선배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무릎을 줄 수 없다는 자존심, 나를 이긴 후배가 내미는 손을 잡지 않겠다는 꼬인 마음은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고 삶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꿇지 않은 무릎과 잡지 않는 손을 상식으로 합니다. 자존심을 세워야 하고 그것을 위해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도, 목회도 그 상식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가장 높은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먼 거리를 가득 채운 은혜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지만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이 상처받은 마음과 자존심을 이기지 못합니다.

 

강호동의 무릎의 길이, 이만기의 팔의 길이를 고민해 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못하는 자존심의 거리를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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