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 홈 >
  • 예배와 말씀 >
  • 목회 칼럼
목회 칼럼
'열린 예배' 와 '열린 교회' na kim 2017-12-17
  • 추천 0
  • 댓글 0
  • 조회 537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14/5354975

열린 예배열린 교회

 

얼마 전에 열린 교회, 열린 성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답글을 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걸린 몇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열린 교회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보수신학을 공부한 목사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망입니다.” 등등의 글이었습니다. 저는 이분들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소위 열린 예배에 대한 경계심입니다.

 

한 때 젊은 목회자들과 앞서 간다는 교회들에서 열린 예배가 꽤 유행했습니다. 소위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라고도 불렀습니다. 시카고 근교에 있는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세가지였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예배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예배는 지루했고, 설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배와 그들의 삶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습니다. 둘째 문화가 달랐습니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현대 문화와 예배는 이질적이었습니다. 경건하고 무겁고 수직적인 억눌림이 있었습니다. 셋째 교회가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삶의 동기와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윌로우 크릭 교회는 구도자 예배, 즉 불신자들을 위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쉽게 교회로 모일 수 있도록,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화적 이질성이 없는 접근하기 쉬운 예배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성경적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건물의 외벽이나 내관을 일반 상업용 건물처럼 만들기도 했습니다. 드라마를 보여주거나 공연하기도 했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생활의 문제들이 설교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한 때 열린 예배는 현대교회의 탈출구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열린 예배는 좋은 공연’(Performance)일 수 있지만 예배’(Service)는 아니라는 비판을 만나게 됩니다. 불신자들이 복음에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돕기는 했는데, 정작 그들을 예배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불신자를 중심에 놓다보니 예배의 중심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점점 더 자극적인 요소들을 개발하게 되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기보다 사람들 간의 소통에 집중했습니다. 예배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예배는 목적이지 수단일 수는 없습니다. 이 예배가 참여하는 사람들을 관객으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소수의 열린 예배를 준비한 사람들이 무대에서 행위를 하면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앉아서 그들을 감상합니다. 예배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참여행위입니다. 예배하는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고민이나 열린 예배를 개발하던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했거나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민과 노력의 결과가 열린 예배였다는 것은 그리 나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는 여전히 구도자 예배를 드리고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원래적 중심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교회의 예배를 본받고 자신들도 그런 예배를 드리고자 했던 교회들이 그 본래적 중심을 상실한데서 왔습니다. 제가 쓴 글에 날카롭게 반응했던 사람들이 표현했던 열린...’이라는 말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들은 여기에서 왔습니다. 그들의 복음과 상황에 대한 고민의 시작,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적 선택들은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을 만들어내면서 다양한 부정적인 결과들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정적인 결과물이 바로 예배의 중심을 상실한 것입니다.

 

성도도, 가정도, 교회도 열려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가 집인지, 어디가 밖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문을 여는 것인지, 그래서 누가 누구의 집으로 들어오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열린다는 것이 세상의 부과 괘락, 자극적이고 화려한 문화에 억지로 문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지, 교회가 그 안에 허락된 복음의 능력과 기쁨을 견디지 못해서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세상에 대해 충분히 개방적이고 포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열림을 당한 것인지, 우리가 세상에 대해 복음적 능력과 영향력의 문을 연 것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마게도냐로 가는 첫 성 빌립보에서 자주장사 루디아의 마음 문을 여신 하나님은 그녀의 집을 열어 빌립보 교회를 세우셨고, 빌립보 감옥 간수의 마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은 그의 가정을 열어 빌립보 교회를 돕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빌립보 교회가 되어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그 지역 사람들의 닫힌 마음의 문들을 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은혜가 함께 증거되었습니다. 같은 은혜와 역사를 기대합니다. 세상의 문을 열고 복음의 대로를 세우는 우리 시대의 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성탄절의 추억 na kim 2017.12.27 0 716
다음글 마음 밭 이야기 1 - 상처로 굳은 ‘길가 밭’ na kim 2017.12.10 0 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