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될 수도 있습니다.”(1)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섬기던 교회에 동향의 집사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사람이 선하고 재미있어서 쉽게 친해졌습니다. 주변을 밝고 재미있게 만들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큰 병원으로 가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위암이었습니다.
이후 집사님은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또 가정에 심방을 할 때마다 항상 웃으면서 “이 정도는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고쳐주실 겁니다.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실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피골이 상접해 가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하게 말하면, 그 분의 음성에서 물기를 느꼈습니다.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질병의 진행 속도는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고 있었고, 부정하려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고쳐주실 겁니다.”라는 말에서 오히려 더 깊은 절망, 더 깊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3년째 한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푸른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가 암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치료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일어설 수 있도록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왔습니다. 올 해 초, 그 기도의 응답으로 치료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좀 더 길고 힘든 항암 치료의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 부부의 야위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제 마음도 함께 야위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 저희들은 할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곧 더 건강한 모습으로 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 분들의 이 말씀이, 이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벽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아무리 스스로를 윽박지르고, 아무리 할 수 있다고 주문을 외워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뛰어넘을 수도 없는 벽은 남아 있습니다. 긍정적인 믿음이 우리를 좀 더 견디게 하고, 낙관적인 사고가 우리를 좀 더 즐겁게 할 수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은 나의 소망일 수 있지만 현실과는 다른 주문과도 같습니다. 오히려 잘 안될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현실을 인정하거나 목표를 수정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하나님의 내 편이라면 왜 나의 긍정과 낙관이 현실화되지 않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불평을 나사로의 누이들에게서 듣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그들은 삶에 찾아온 한계를 만났고,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해 이미 예수님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체하셨고, 나사로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그들로부터 이런 원망 듣기를 자초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요 11: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와 요 12: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날 현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이 한 가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자람의 위안’이라는 책에서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는 자신의 목회에서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오직 믿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을 이기려고 애쓰는 성도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형제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일이 가능하고 또 형제에게 그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하지만, 안타깝게도 형제의 질병은 악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뜻은 치유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보다 먼저 만나실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이런 권면을 받은 성도가 비로소 안도감을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낙관적인 태도를 지키지 않으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목회자로부터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내적인 자유를 권면 받은 것입니다. 비로소 그들은 인생을 마칠 준비를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고 보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용서하고 사랑을 마음껏 베푸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밀도 있고 복된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 뜻이 관철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좋은 기도를 드려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그 뜻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열어서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통하실 것입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