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 3. 신비와 영광 | na kim | 2017-0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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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 골로새서 2017. 1. 10. 3. 신비와 영광(골 1:24-29) 어제 저녁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잠자리에 누운 나를 아줌마가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다급히 할머니들 방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정신질환을 앓으시는 아줌마가 간질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간질 하는 도중 소변과 대변을 보고 누워 계시는 것을 지켜보노라니 얼마 후엔 소변이 흘러 옆에 주무시는 할머니의 요에까지 흠뻑 젖었습니다. 젖은 이불을 정리하고 아줌마를 모시고 화장실로 가서 몸을 씻겨드리고 머리도 다시 감겨드리는데 다시 욕실 바닥에 앉아서 그대로 변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양으로! 오물을 화장실 변기에 버리고 다시 화장실 바닥을 청소하고 아줌마를 다시 씻기고 방으로 모셔 새 이불과 요를 가져다 드리고, 화장실에 가서 더러워진 옷을 빨고 냄새나는 화장실 청소를 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누웠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눈도 다시 콕콕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눈에 안약을 넣고 자리에 누우니 다시 다급히 부르는 소리! 할머니 방으로 가 보니 그 아줌마가 이번에는 이불과 요 방바닥에 저녁에 먹은 음식들을 다 토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아까 깨끗이 씻겨드리고 이불도 새것으로 드렸는데…. 이불, 옷까지 다 버려 새로 옷을 갈아 입혀드리고 수건으로 다시 닦아드리고, 요 커버를 벗기고 방바닥의 오물을 다 담아 치우고… 정말 너무도 한꺼번에 일어난 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정리해 드리고 잘 주무시라는 인사까지 하고 조용히 그 방에서 물러 나왔습니다.
거의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온 후 저는 자리에 누워 울었습니다. 내가 과연 감당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일까? 그 동안, 내 사역은 그저 공동체 식구들 밥해주는 것과 살림해주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다 보니 정말 내 자신은 이 사역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맘이 들었습니다. 정말 내가 너무 쉽게 이 사역을 생각했었나보다… 하는 마음과, 지난번 속옷에 변을 묻혀서 내놓는 아저씨 때문에 고민하는 저에게 남편은 나중엔 이보다 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힘들어하면 어쩌냐고 했던 그 말도 생각나고… 앞으로의 모든 일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저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작은 일도 크게 받아들이는 소심한 저는 이번 일로 좀 더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고, 또한 앞으로 이 사역을 감당할 동안 다가오게 될 모든 일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제 자신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저는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이 일이 싫다거나 하기 싫은 적은 절대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저의 마음에 소망으로 두고 이루어 가시는 것임을 믿기에 행복한 마음으로 즐겁게 생활합니다. 이번 일이 저를 무척 힘들게 하였지만, 그러나 이번 일로 제 자신이 좀 더 성숙해져 가며 단련되어져 간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일에 펄쩍 뛰는 제가 좀 어리지요? 제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 에벤에셀 공동체를 섬기는 김명희 사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1:24) 이 세상에서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이름으로 살기로 결단하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고 외면할 수 있는 일인데, 그 이름에 허락된 의미와 영광 때문에 성도는 ‘고난’의 길을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받는 괴로움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같이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 괴로움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기쁘게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바울 또한 기쁨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집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과정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남은 고난’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지 못하신 십자가, 혹은 우리에게 남겨 놓으신 죄의 대가로서의 고통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남은 고난’이란 예수님이 성도와 교회에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받을 수 있는 고통과 괴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고난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사명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위해 그 사명을 감당하신 것처럼 바울은 이제 골로새 교회를 위해 그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이 된 목적(1:25)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군이 된 목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경륜(the dispensation of God)’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경륜’이라는 말이 개정개역 성경에서는 ‘직분’(commission)으로 번역되기는 했지만 ‘경륜’이라는 단어가 더 좋은 번역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일정한 목표를 가지고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함. 세상을 다스림’입니다. 헬라어로는 '오이코노미아'인데,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관리하다'는 뜻의 '노메오'가 결합된 표현입니다. '집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 즉 '청지기 직분'(stewardship)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되면 세상 만물의 운행과 질서를 주장하시고 온 역사를 주관하시며, 인간 구원의 계획과 실행 등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와 섭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의 시간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시간과 섭리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일군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뜻을 이루고 계시고 그 뜻을 이루는 과정에 있어서 바울을 일군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사명의 기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통해서 다가왔습니다. 거부할 수 없고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바울을 향한 경륜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각각 일군을 세우시고 함께 일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받은 사명을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며 헌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비밀의 영광(1:26-27) 26절에서 ‘만세와 만대(Ages and Generation)’ 또한 시간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제한이 있는 시간, 즉 사람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경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구원계획은 피조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준비되었고 이제 그것이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도’란 골로새 교회를 비롯한 모든 이방 성도들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계획이 이미 창세 전에 있었음을 밝힘으로 바울의 사역의 기원과 목적을 함께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향한 놀라운 계획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보며 놀라고 또 놀랍니다. 이 일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있을 수도, 가능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는 신분의 구별이 철저했습니다. 귀족이 자신의 노예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비밀(mystery)’이라고 부릅니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자신과 교회에 대하여 일어났고 자신은 그 일을 감당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mistery(비밀/신비)의 한없는 영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섭리입니다. mysterious하다는 말 외에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딱 한 단어만 그 신비에 어울립니다. 바로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그 비밀을 깊이 깨달아갈수록 하나님은 내게서 더욱 높아지고 나는 그 하나님 앞에서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4. 비밀의 성격(1:28-29)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secret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mystery로 믿을 수 없는 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secret으로서의 비밀은 감출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적은 사람이 알수록 가치를 발합니다. 하지만 지금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계속 전파되어야 합니다. 너무 mysterious해서 사람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밝히 계시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증거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 진리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진리와 비밀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또 다른 많은 사람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증거하는 일에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29절에는 바울의 선교의 열정과 사역에 대한 수고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의 경륜이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내 안에서 성취되기 위해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말씀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요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진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신비가 영광 가운데 세상에 증거됩니다. 알고 보면 내가 다른 사람의 백가지 변화를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나 자신이 말씀을 따라 한 가지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나 자신의 한 가지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백사람의 만 가지 잘못을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 앞에 서서 받은 사명을 만지작거립니다. 이 사명으로 사는 것이 옳은지, 세상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 옳은지를 고민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아직 내 안에서 작동하지 않고 있고, 그 영광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내 입으로는 고백되지만 삶으로는 증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벤에셀 공동체의 김명희 사모님의 글을 다시 묵상합니다. 우리는 정말 얼마나 완고한 변화될 수 없는 본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작은 변화 하나도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비밀이 아니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귀한 사명이 성취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획의 신비와 영광이 나타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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