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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 4. 하늘의 보좌를 움직일 것인가? 나를 변화시킬 것인가? 이응도 목사 201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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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늘의 보좌를 움직일 것인가? 나를 변화시킬 것인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라는 표현은 한국 교회를 오랫동안 유혹했던 기도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이 표현에는 적어도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어야 능력 있는 기도자가 된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도의 이미지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눅 18:2-5)’나 ‘악한 친구의 비유(눅 11:5-8)’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과부 혹은 친구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끈질기게 요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원래의 비유의 의도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도의 본질을 심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두 비유가 ‘끈질기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자리에, 혹은 악한 친구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가장 선한 것을 주시는 사랑과 은혜의 아버지’와 불의하고 악한 재판관, 혹은 친구는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무엇을 움직일 것인가?


실존주의자였던 키에르 케고르는 성도였습니다. 그는 “기도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우리 삶을 향한 우리 자신의 욕망을 제거해가는 과정입니다. 또한 기도는 내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에 맡겨드리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의 깊이는 하나님과의 사귐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변화된 삶만큼 변화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초점을 하나님을 움직이는데 둔다면 하나님은 사람의 소원이 형상화된 우상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에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고 기도를 통해 순종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강퍅하고 굳은 내 마음을 움직이며 내 삶의 자리와 지향점을 변화시크는 동력이 됩니다.


2. 입술로 기도하는가? 마음으로 기도하는가?


부교역자 시절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백종국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스승으로 모시던 손 봉호 교수와 함께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을 했던 분입니다. 백교수님과 교제하면서 생각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하루는 월요일에 교수 연구실로 찾아가서 차를 마시면서 교제를 했습니다. 그 때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강도사님, 요즘은 강도사님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설교는 하시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때는 그저 칭찬이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리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설교를 할 수도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들어온 말,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론, 내 생각과 내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닌 듣고 배우고 익숙한 말들, 내 마음에 뿌리내린 말이 아니라 논리가 논리를 만들어서 형식적으로 전달되는 말들… 설교자가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자 함정인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듣고 배운대로 말하는 설교가 하니라 고민하는 설교를 한다는 것이고, 주관적인 감성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말씀과 자아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설교를 하되 입술로 할 것인가? 아니면 깊은 고민과 생각의 샘에서 길어 올릴 것인가의 차이가 아닐까요?


같은 이야기를 기도에 대해서도 할 수 있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기도
하는지 모르고 기도하는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기도하다 보니, 혹은 급한 마음으로 기도하다 보니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무엇을 간구하는지 망각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부지런히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하나님과의 교감(communication)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입으로 기도했는지, 마음으로 기도했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는 “기도에 필요한 것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가고 같은 뜻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만나는 곳이며, 성도의 삶과 하나님의 뜻이 섞이는 장소입니다.


3. 믿음입니까? 불신입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같은 기도를 수없이 반복하는 기도 행위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믿음의 행위일까요? 불신의 행위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당장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기도가 일정한 횟수를 채우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아시고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청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든지 혹은 우리가 잘못 알고 필요 없는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행복을 원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늘 선한 것을 준비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 확신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했으므로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의탁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를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유혹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시도를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굴복시켜 우리의 소원을 이루겠다는 기도를 반복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불신이요, 신앙이 아닌 신념에 불과합니다.


4. 비유의 핵심


다시 예수님의 두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왜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 아버지를 비교하셨을까요?


불의한 재판관, 악한 친구의 비유의 핵심은 결국 그들이 “응답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 이후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단어에 주목합시다. “하물며~”입니다. “악한 그들도 간청하면 결국 들어주지 않더냐? 하물며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들의 소원을 외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우리의 소원’에 초점 맞춰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눅 11:9-13을 봅시다. 결국 예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입니다.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구하는 대로, 찾는 대로, 문을 두드리는 대로 내 마음의 모든 소원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눅 18:1-8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초점을 조금 달리합니다. 이 비유를 주신 목적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1절에서 ‘기도하고 낙심치 말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불의하고 악한 재판관도 거듭 요청하면 들어줄 수 밖에 없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선하고 아름다운 아버지께서 너희의 기도를 잊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 백성들의 기도를 외면하거나 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구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뤄 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란 믿음의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 믿고 평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상담을 하다 보면 때로 아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피상담자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는 가운데 이미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그저 들어주면 됩니다. 가끔 생각의 맥만 바로 잡아주면 지혜로운 피상담자는 자신이 나가야 할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때로 ‘상담자(counselor)’라고 표현하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상담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피상담자가 상담자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드러내고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피상담자가 자신의 삶을 고수하면서 오히려 상담자의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에 불과합니다. 영국의 성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끊임없는 지식으로 충만하기를 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기도의 최대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게 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바람과 생각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기도,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교회와 성도는 이것에 매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이 교통하는 가장 아름답고 적극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이 통로를 아름답고 효과적으로 잘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땅을 사는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길 -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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