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22. 요셉 소명 17.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 이응도 목사 | 2012-09-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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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2012. 8. 22. 요셉 소명 - 17.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21) 다윗의 시편 가운데 가장 비통하고 슬픈 시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시편 55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과 사랑했던 신하 아히도벨의 배신으로 시작된 고난에 관한 시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지 32년이 지났고, 왕권은 공고해지고 나라는 든든히 서가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분야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는데, 아들과 신하가 공모하여 다윗에게 칼을 들이댑니다. 황급하게 왕궁을 버리고 도망가던 다윗은 그 길에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합니다. 압살롬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여인을 취하였고, 사울왕이 속했던 벤냐민 지파는 다윗을 비난하고 위협합니다. 왕위에 앉아서 권력을 휘두를 때는 모두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쫓겨 다니며 목숨을 구하다 보니 모두가 적들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은 시편 55편을 지어 노래합니다. 다윗의 고난은 멀리서 오지 않았습니다. 55편 9절을 보시면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다스리던 예루살렘 성에서 그의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안전하고 평안한 줄 알았는데,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시 55:10下-11)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나를 책망하는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아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여 나이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시 55:12-14) 어쩌면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눈 앞에 놓인 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시 헤매게 된 광야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가 가장 괴로운 이유는 자신이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신이었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노래하며 함께 말씀을 논했었는데, 그 모든 날들 동안에 그들의 마음 속에는 칼날이 숨겨져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입술로는 함께 노래하며 말씀을 나누었지만, 함께 손을 잡고 찬양하며 춤 췄지만, 서로를 다독이며 안아주며 어려움을 이겨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리한 칼날이 숨어 있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 대하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 55:20-21)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합니다. 마음의 괴로움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칼에 죽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낙심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역경을 이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 이보다 더 어려운 때도 있었습니다. 이전에 이보다 더 절망스러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자신과 함께 하시고 지키셨던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가 사는 세상의 일이 어렵고 힘들게 꼬여갈 때 그가 늘 되돌아갔던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2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살 수 있는지를 압니다. 그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그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늘 한 길 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때에도 평강의 때에도, 슬픔의 때에도 기쁨의 때에도, 실패의 때에도 성공의 때에도 늘 다윗에게는 오직 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바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그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교만해지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 수 있는 영적인 현실을 고백하면서 그는 하나님께로 다시 한번 돌아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그의 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합니다. 1. 바울의 고난 바울은 참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과정에서 예수를 만나고 믿고 사도가 된 그에게 있어서 고난은 자신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6:17에서 ‘예수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지녔다고 말할 만큼 모든 고난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바울이 자신이 당한 이런 고난들에 대해 한번도 불평하거나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그를 단련시키고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더욱 연약해지고 더욱 그리스도만을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삶이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힘든 시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몸과 삶의 환경에 다가오는 그 어떤 어려움도 넉넉하게 이겨낸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힘들고 어려웠던 시험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2. 떠나는 사람들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시점은 그가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순교하기 직전으로 생각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으로 부름 받을 시점이 가까워옴을 느낀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디모데의 소심한 성품과 연약한 건강이 목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고난을 넉넉히 감당하는 믿음’을 언급합니다.(딤후 2:3/네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복음은 늘 고난과 함께 다가오는 것이며 인내하면 영광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딤후 2:10/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그런데 바울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처럼 원칙에 충실하고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에게 있어서 다소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힘들 수 있습니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에서 낙오했던 마가를 2차 전도 여행에서 제외시키고자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선교팀에서 낙오한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선교팀 전체의 문제일 수 있고, 바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 관대했던 바나바와 2차 선교 여행 때에는 결국 결별하는 것도, 크게 보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유익했겠지만, 바울 개인에 있어서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스승이자 친구이자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선교의 여정에서 여러 번 이런 일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푯대를 향하여(빌 3: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달리는 길에 시험과 유혹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시험이나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넉넉하게 잘 견디는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 대항 아픔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몇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 교회에서 파송되어 바울과 함께 로마의 옥중 사역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와 데마와 그레스게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누가만 남고 데마와 그레스게가 떠나버렸습니다. 14절에 나오는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딤전 1:20에서도 후메내오와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과 양심을 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복음을 방해하고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딤후 4:15-16절에 의하면 바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서 옥에 갇히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아무도 바울 곁에서 바울을 위해 증언해주지 않았습니다.(딤후 4:16/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물론 그런 순간에도 바울은 오직 주님을 의지합니다.(딤후4:17/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하게 하심은….) 이제 연로하고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바울은 한때 함께 믿고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낙오하고 배반하는 일에 대한 큰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3. 너는 나에게 오라! 물론 바울이 그들을 의지하거나 그들 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의지하여 고난을 이기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다만 함께 복음을 전했던 그들의 연약함이 그들의 신앙의 진보를 가로막는 일과 그들을 통해 전진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오히려 그들에게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함께 고난 받고 함께 기쁨을 나누었던 그들의 낙오가 복음의 열정을 마지막으로 불태우고 있는 바울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열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외로움과 남겨짐에 대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부릅니다. 디모데가 그들에 비해서 더 나은 사역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디모데를 의지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서로를 격려하고 세우며 각자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을 보다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거듭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너는 속이 나에게 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함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주시고 서로에게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조력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부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바울에게는 함께 일하고 섬기고 고난과 고통을 나누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필요가 곧 그들을 의지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자신과 함께 하시고 사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명을 감당할 때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며 손 잡아주는 동지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연로한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간곡하게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우리가 서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모이며 교제하며 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인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욱 격려하여 세우고 사랑함으로써 더욱 견고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4. 서로를 손짓하여 부르라!, 신약 성경에서 ‘관계’를 의미하는 부사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도 많이 사용하셨고, 바울 서신에도 많이 사용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왜 이 단어가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을까요? 예, 이 단어는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연결되어 있고, 함께 의지하고 있으며, 함께 세워지고 있습니다. 앞서 가고, 따라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바울이 스승이자 아버지이지만 그는 지금 디모데를 손짓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목회적 상황이 어려운 디모데 또한 바울의 권면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사는 모든 성도는 모든 성도가 필요하며 서로 함께 힘을 주고 격려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들에게 바울의 마음의 공허함과 디모데를 향한 간절한 부름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들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셉 소명을 마치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보다 먼저 보이고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소명이 적용되어야 할 이 세상이 얼마나 강하고 악하며, 그 소명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비겁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시고 우리들을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서로를 손짓하여 부르며 서로를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 소명 ? 우리들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자 마음입니다. 그 소명 이루기 위해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자리에서 섬길 수 있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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