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31. 십자가 위에 서다 - 3. "여자여, 보소서!" | 이응도 목사 | 2012-11-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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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2012. 10. 31. 십자가 위에 서다. - 3. “여자여, 보소서!” 예수님을 이해할 때 우리는 완전한 사람과 완전한 신(神)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남께서 완벽하게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을 삶을 사신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인류를 죄와 악에서 해방시키시는 사역을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의 삶의 조건들 가운데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일들을 신적인 능력으로 해결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이적’이라 부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신 증거로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물과 성령으로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푸시고, 천국을 선포하시는 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이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 눈 멀고 귀먹고 다리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는 일들이 신적 영역에 속한 사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이보다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시고, 사람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을 당하시면서 절망 가운데 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가족관계, 예수님의 눈물과 분노 등은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도 이 두 가지 모습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절망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모습, 결국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치며 탄식하는 모습,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마지막 숨을 내쉬는 모습은 완전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예수님 한 분에게서 성취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 가운데서 사람이자 신이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 가늘고 섬세한 선을 타고 넘나들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세 번째 예수님의 말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나누는 대화에서입니다. 아들된 예수님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이 흘린 피로 적신 십자가 밑둥에 기대어 서서, 여전히 피 뚝뚝 떨어지는 아들의 발을 부등켜 안을 때, 아들된 예수님은 마른 목소리로 말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 1. “여자여...여자여....” 단테는 마리아에 대해 말하기를 “처녀 어머니여, 당신 아들의 딸이여!”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마리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이성적 접근입니다.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세 번째 말에 대해 논쟁해왔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느끼는 아들로서의 감성에 관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아들로서 애틋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이 마지막 말을 남긴 것일까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의 안녕을 부탁할 만큼 예수님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은 ‘여인’ 혹은 ‘여자’라는 표현에 대한 몇 가지 기억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였습니다.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이 때 예수님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다정한 표현으로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이 때 사용된 ‘여자’라는 표현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사마리아 여인(요 4:21)이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요 8:10)에게서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가나의 결혼식장이나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를 바라보며 ‘여자여!’라고 말한 것은 적어도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배려나 존경이 있는 표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을 그리 가정 친화적인 인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족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는데 걸림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때 가정은 ‘하나님 나라’라는 참된 가치를 향한 발걸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 땅에 가치들 가운데 사람을 가장 연약하게 만드는 감성적 존재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어머니와 형제들 앞에서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4-35)라고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세 번째 말씀을 감성적 언어로 보지 않아도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2. 아브라함과 이삭, 마리아와 예수님 그렇다면 왜 요한은 요한복음의 시작과 마지막에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여자여!’라는 말을 통해 다소 건조하고 공식적인 관계임을 확인하고 있을까요? 요한은 이 표현에서 어떤 숨겨진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를 ‘모성’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어쩌면 어머니 마리아는 단테가 표현한 대로 육체적인 어머니이면서 또한 영적인 딸일 수도 있는 관계였습니다. 이 관계를 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일과 자신의 어머니로 섬기라고 한 일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종종 예수님을 새 아담, 새 모세, 혹은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새다윗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을 새로운 아브라함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요, 이스라엘이 시작인 아브라함을 예수님과 관련시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로마 교황청에서 강론 사역을 하는 칸탈라메사 주교는 이 부분에 대해 의미있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는 신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마리아의 역할은 마치 구약의 아브라함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믿음으로 새로운 길을 걸었던 아브라함처럼,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라는 반응을 합니다. 칸탈라메사 주교는 이러한 반응을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길을 열었던 아브라함에 비유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삭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사용하셨습니다. 아들이 제물로 드려지는 상황 - 믿음이 아니라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반응했고, 마리아 또한 그러했습니다. 아들이자 곧 하나님인 예수님이 걷는 길을 믿음으로 함께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을 다음의 두 가지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제물로 드려지는 아들을 보소서! 먼저 논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아들이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음에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라고 말씀하신 것과 비교해 볼 때,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나를 대신할 새로운 아들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이전에 마리아를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과의 일관성으로 볼 때 그리 많은 지지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를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의 죽음에 대해 절망하거나 슬픔에 사로잡혀 신앙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을 걱정했을 수 있습니다. 감정에 호소하거나 감상적이 되지 말라는 당부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 동정녀로서 아들을 낳아야했던 고통의 시간들을 믿음으로 순종했던 때를 기억하라는 부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의 죽음을 지켜봐달라는 부탁입니다. 이 아들은 지금 거룩한 제물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탄생 전부부터 처녀 마리아에게 예언되었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라오서의 죽음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 보십시오. 저는 어머니가 저를 낳기 전에 예언된 죽음을 이제 당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입니다. 모든 불의와 죄악을 한 몸에 지고 지금 이렇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나는 당신의 아들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2) 새롭게 시작된 관계를 보소서!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은 여기서 표현된 아들이 제자 요한을 포함했을 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후에 예수님이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는 사실과 관련할 때 예수님은 좀 더 확대된 의미로 ‘아들입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한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의 제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 당신 곁에 아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아들의 제자가 아닌 마리아 자신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받을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이 말은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하는 말과 함께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여는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보라, 너의 어머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말씀을 마친 후 제자 요한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 너의 스승의 어머니가 아닌 너의 어머니가 여기에 있다.”(요 19:27)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두 사람에게 부탁한 새로운 관계에 대한 말씀은 교회사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어머니 마리아가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달라는 부탁, 그리고 자신의 죽음 뒤에 남겨진 어머니를 제자의 어머니로 받으라는 부탁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죽음 앞에서 인류는 모든 적대적 관계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관계, 죄와 악과 사망이 지배하던 관계에서 자유를 얻고 새로운 관계로 들어갑니다. 그 관계의 이름은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왜 마리아를 ‘어머니!’라는 감성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여자여!’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부르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중 하나일 수 있는 여자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관계를 열고, 그 관계 속에 두 사람을 초청하며 우리들 모두를 초청하고자 하시는 ‘죽임당한 어린 양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아! 보아라, 이것이 내가 만드는 새로운 관계이다. 이것이 교회다. 나의 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내가 죽어 새롭게 만드는 가족이다. 나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이다. 너와 나의 어머니가 함께 걸어야 할 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열어주신 새로운 관계, 우리는 그 관계를 교회라 부르며 모이고 있습니다. 믿음 있는 자만이 죽음의 세상 가운데 그 관계 속에 들어갑니다. 그 관계 속에서 참된 기쁨과 평강을 얻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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