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7. 십자가 위에 서다. - 4. 아버지의 의(마 27:46) | 이응도 목사 | 2012-11-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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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성경공부 2012. 11. 7.
십자가 위에 서다. - 4. 아버지의 의(마 27:46)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슬픔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버려짐’ 혹은 ‘잊혀짐’일 것입니다. 수많은 문학 작품과 노래가 이것을 주제로 만들어졌고, 여전히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질까, 잊혀질까 두려워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 또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하나님은 나를 잊으셨는지, 나를 절망 가운데 버리셨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험하고 악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고 잊혀진 인생만큼 슬프고 절망적인 인생은 없다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던지시는 질문도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어찌 나를 잊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 은혜를 잊은 패역한 백성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통해 우리들을 위해 흘리신 피와 찢으신 살을 늘 기억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한꺼번에 완전히 버림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처절하게 배신당하고, 손가락질과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과 발길질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아무도 함께 누울 수 없는 십자가 위에서 그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도록 못 박혀서 절망 가운데 죽어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에 왔는데, 그 뜻의 마지막은 ‘완전한 버림받음’이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분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처절하게 외치고 절망 가운데 숨을 거두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공감(共感)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사건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언제? 어떻게?”라는 문제를 대답할 수 없을 뿐이지 우리는 분명 그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애써 그 현실을 외면하고 마치 내게는 그러한 고통의 때가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 인생에 분명한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우리의 삶에 부인할 수 없는 진실로 다가오는 죽음, 그것은 다른 말로 버려짐이요, 이별입니다. 살아 숨 쉬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서 멀어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들 모두가 마음 한 켠에 애써 숨기고 살아가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또한 새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외치십니다. 그는 지금 죽음의 문에 막 들어서고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다소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적어도 예수님이라면, 하나님께서 보내심에 대한 확신 가운데 이 땅에 오셨고, 메시야로서의 자신에 대한 믿음에 충만하셨을 예수님이라면 이런 정도의 절망을 극복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은근히 안도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아... 예수님도 나와 같이 절망하시는구나... 예수님도 나와 같이 두려워하시는구나... 예수님도 나처럼 아파하시고 버림받기 싫으시고 고독하시구나.... 예수님도 십자가를 정말 벗어나고 싶으셨겠구나.... 이 치욕의 인생에서 훌쩍 뛰어내려 조롱하는 모든 무리들을 벌하시고 싶었겠구나.... 예수님도 하나님을 원망할만큼 고통과 외로움에 몸부림치셨구나....’ 그리고 또 마음 한 구석을 스며드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 예수님은 나의 불안함을 이해하시겠구나... 나의 연약함과 비겁함을 받아주시겠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인 나와 공감(共感)하고 계시는구나.... 내 눈물과 아픔과 고통에 대해 고개 끄덕여주시고 안아주시겠구나.....’ 2. 질문(質問)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1-2) 예수님은 시편22편에서 시인이 절망 가운데 부르짖은 기도와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디. 그래서 시편 22편을 메시아 예언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인용하여 이러한 절망을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절망과 시편22편의 시인의 절망이 깊은 고독 가운데 만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절망의 진실성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만일 시인이 결국은 하나님이 구해주시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것을 알면서 이런 절망을 표현했다만, 즉 읽는 사람들의 감동과 교훈을 위해서 이런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면 과연 우리는 시편 22편을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까요? 이 시편을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는 이유는 이러한 두려움과 고통에 찬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요, 시인의 깊은 고독이 우리의 고독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인의 고통이나 원망이 조작된 것이라면 이 시는 성경이 아닌 넋두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위장된 절망, 즉 모든 구원의 계획을 아시고 준비된 상태에서 짧은 순간 지나가야 할 과정으로서의 절망을 표현하신 것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심각하게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기 위에 계신 예수님, 아니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뜻을 완전히 이루고 계실 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고통에 대하여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거나 신격으로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의 절망은 사람의 절망이되 그 어떤 사람도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깊은 절망입니다. 가장 깊은 고통과 한숨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모두 버림받고 있는 한 생명의 처절한 외침입니다. 3. 고통(苦痛) ‘십자가 위의 예수’라는 책을 쓴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하나님이 가장 잘 드러날 때는 그분이 우리로부터 가장 멀리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데이빗 하트의 말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순간, 절대적으로 가장 특별한 순간, 십자가에 의한 절대적 버려짐의 순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의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 분의 능력이 있어야 할 곳, 나타나야 할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가장 먼 거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 그것과 가장 먼 거리에 사람조차 용납할 수 없는 흉악한 죄를 범한 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먼 거리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 먼 거리만큼 하나님은 고통당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고통, 그것은 인류가 경험해야 할 영적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깊이를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몸으로 당하시고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보여주시는 고통의 절정은 바로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외침입니다. 이 부르짖음의 현장에서 누가 더 고통스러울까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실까요? 물론 이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에 속하고 대답 또한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시고 함께 고통당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부르짖음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이 부르짖음은 육신의 고통, 감성적인 두려움을 극대화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부르짖음입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입니다. 아들을 버리는 아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인류에 대한 절망적인 부르짖음입니다. 이 아들의 이러한 죽음이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로 들어선 인류에 대한 절망입니다. 어찌하여 이토록 어리석고 부패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이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4. 하나님의 의(義) 생각해봅시다. 대의(大義)를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의로운 아버지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이 아닌, 자신을 먼저 희생하는 아버지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을 희생하는 아버지가 있을까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거룩한 의일 때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의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거룩한 뜻을 세우고 그 아들을 세상 가운데 보내신다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의’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가르치실 때 가장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에 ‘아버지’만큼 좋은 예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이러한 설명은 오해를 낳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우리들은 때로 아들보다 이기적이고 부족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다 알기에는 부족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또한 우리들, 사람들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많은 것을 설명해주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이지만 서로가 일체이시며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혈연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부자의 관계와는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을 보내시는 사랑, 그것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영이신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뜻으로 예수님 안에 함께 계십니다. 이미 동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외침을 “아버지가 왜 아들을 죽음 가운데 버리십니까!”라는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절망과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당할 수 있는 고통의 경계에 서 계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셔서 거룩한 뜻으로,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실 수 있도록 격려하고 붙드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십자가 위에 내려놓고 자신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아버지가 아니라, 가장 멀고도 가까운 거리에서 아들과 함께 고통당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고통과 아버지의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충만히 이뤄가시는 것입니다.
가장 거리가 먼 곳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시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죽음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그 먼 거리만큼 인류의 죄를 품으시고 뜻으로 함께 하셔서 아들의 죽음으로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세상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의 의가 이루지고,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 땅 가운데서 이뤄지도록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뤄지는 현장이 오늘날 교회가 되며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에 교회이자 성도의 삶입니다. 늘 감사하고 늘 헌신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가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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