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0.09 기쁨의 공동체-24.좋은 슬픔, 나쁜 기쁨 | na kim | 2013-10-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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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9. 로마서 12장 기쁨의 공동체 24
“좋은 슬픔, 나쁜 기쁨”(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미르바 던의 ‘The Truly community’에는 한 캠퍼스 선교회에서 보고한 비극적인 사건이 소개됩니다. 한 신실한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앙이 없는 자신의 룸메이트를 전도하기 위해 늘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기쁨이 충만한지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때로 좋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해도 성령님께서 그 모든 일 가운데 자신을 돕기 위해 역사하시며 그래서 모든 일은 행복으로 끝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룸메이트도 마음이 변하게 되었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주 후 그 룸메이트는 메모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녀는 메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실 늘 행복하지는 않아.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아서 우울해질 때가 많아. 아마 나는 참된 크리스천은 될 수 없나봐.”
미르바 던은 그녀가 속했던 선교회가 우리의 신앙에서 사람이 가진 감정의 위치를 좀 잘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런 비극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롬 12:15 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두 가지 차원
본문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비록 성도라고 할지라도 세상을 사는 중에 환경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진실해야 하고 다른 성도의 감정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무관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환경에 대한 우리의 반응적인 감정은 ‘함께’ 느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래리 리차즈(Larry Richards)는 ‘69 Ways to Start a Study Group and Keep It Growing’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신앙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실패와 실수, 고통을 경험하는 ‘정적(情的)이면서 인간적인 영역’입니다. 우리는 이 첫 번째 차원의 삶을 성도와 교회를 통해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이해하게 되고, 사랑 받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산다는 것이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초인적인 영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삶임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두 번째 차원의 삶은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는 삶의 영역입니다.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은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악,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며 살아가는 역동적(力動的)인 삶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정적인 차원의 삶을 나누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역동적인 삶의 영역만을 나타내 보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신앙과 삶의 현실적인 접촉점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정적인 것만 나누기를 원하고 역동적인 삶을 외면한다면 복음의 능력과 소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공동체는 건강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이 두 가지 영역의 삶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2. 그러므로 “함께 하라!”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이 두 가지 삶의 영역을 조화시켜서 건강한 균형을 얻을 수 있을까요? 롬 12:15이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해 하나의 전치사로 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함’(with)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의 ‘함께 함’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함께 하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연약한 부분이 있고 그것은 다른 지체들의 사랑으로 채워짐을 얻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확신 가운데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2) 여기서 ‘피차’라는 말과 12:15에서의 ‘함께’라는 말은 서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감정에 대해 진실해야 합니다. 슬픔과 기쁨을 감추는 환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잠시 슬퍼해주고 기뻐해주는 것도 안됩니다. 지금은 잠시 함께 울어줄테니까 좀 있다가 좀 생각해보자...는 태도 또한 곤란합니다. 내가 느끼고 있는 슬핌과 기쁨에 대해 가식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때에도 진솔한 감정으로 해야 합니다. 쉽지 않는 일입니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가진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함께(with) 할 뿐이지 그 사람이 된 것(be)은 아닙니다. 잘못된 이해는 우월감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다만 다른 성도들과 같은 감정을 나누며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성도로서 다른 지체에 대해 해야 할 의무를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향한 헌신’을 결단해야 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나의 문제인 거처럼 고민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문화는 서로를 위해 시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들은 만일 우리가 예전 시대의 삶의 패턴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어주고, 이웃들과 문을 두 드려 음식을 나누며, 가족들끼리 몸을 스킨쉽을 하며 놀이 시간을 갖고, 여름 저녁에 부부가 뜰 앞에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이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함께 함’, ‘함께 기뻐하고 슬퍼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함께 시간과 삶을 나누면서 ‘대화’, ‘서로에 대한 경이로움’, ‘기다림’, ‘만져줌’ 등의 미덕이 필요합니다.
3. 좋은 슬픔, 나쁜 기쁨
일반적으로 우리는 슬픔을 부정적이고 나쁜 것으로, 기쁨을 긍정적이고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은 좋은 슬픔과 나쁜 기쁨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슬픔이요, 무엇이 나쁜 기쁨일 수 있을까요?
좋은 슬픔은 ‘함께 슬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을 치료하시는 과정으로 삼는 슬픔입니다. 고통과 슬픔 없는 삶은 없습니다. 다만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다루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의 답은 ‘함께 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함께 연약함을 나누기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며 마음과 삶을 사용할 때 하나님이 세밀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슬픔이 좋은 슬픔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좋은 슬픔을 가로막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슬픔을 당한 지체가 그것을 다른 지체와 나누려 하지 않을 때입니다. 수치심과 자존심, 두려움과 염려가 그 마음 속에 있습니다. 늘 좋은 것만 보여줘야 한다는 잘못된 신앙에 대한 개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다른 지체의 연약함에 대해 그리 오래 참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오래 참고, 모든 것에 대해 참는 것입니다. 지체의 연약함을 잘 참아 견디면서 사랑으로 품는 마음이 우리가 당한 슬픔을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은혜’로 해결하는 길입니다.
나쁜 기쁨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와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집니다. 우리는 충분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지체의 기쁨이 몸 전체의 기쁨이 되지 못할 때, 혹은 일부 지체가 몸의 기쁨을 공유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주신 선한 기쁨이 우리의 관계 속에서 나쁜 기쁨으로 변합니다. 이 때 기쁨은 오히려 몸의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기쁨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두 가지 지점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 언급한대로 그 기쁨이 개인화될 때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추수를 마친 부자의 기쁨이 그것입니다. 솔로몬이 누리려고 했던 쾌락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나의 기쁨은 다른 사람의 슬픔과 연관되어 있고, 나의 승리는 다른 사람의 패배와 관련있습니다. 자신의 작은 성공이나 성취에 감사함이 없는 기쁨만으로 반응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아픔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기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태도는 기쁨을 나쁜 것으로 만듭니다. 다른 지체의 기쁨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을 때 기쁨은 오히려 관계를 깨뜨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모든 기쁨은 은혜입니다. 감사함으로 받고 기꺼이 그 기쁨의 열매를 다른 지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기쁨에 대해 자랑이 아닌, 감사함이 있을 때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4.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다.
오늘 로마서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없는 슬픔을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허락하신 기쁨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지 그 답을 제시합니다. 바로 ‘함께 함’(with)입니다. 이 지혜와 은혜 속에 우리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가장 좋은 선물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땅에 사는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를 통해 삶으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이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인 교회 공동체도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기 위한 조건은 기쁨과 슬픔을 좋은 것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잘 타나나 있습니다. ‘서로가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서로가 함께’ 허락하신 목적과 비전으로 협력할 때, 교회는 세상에 허락된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슬픔을 녹여내고 기쁨을 재생산하는 아름다운 터전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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