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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06 기쁨의 공동체-26."선한 삶의 원칙" na kim 201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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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6. 로마서 12장 기쁨의 공동체 26

선한 삶의 원칙”(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2:17)

요즘 한국 교계에 크게 화제가 되는 두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W.C.C. 총회의 부산 개최를 반대하는 보수 교단의 집단적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를 기념하는 일부 교회의 추모 예배입니다.

W.C.C.는 세계 교회 협의회라 불리는 단체로 기독교라는 하나의 공통점 아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교파들의 연합체입니다. 당연히 신학적인 색깔과 지향점이 다양하고 목소리 또한 다양합니다. 이 단체는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를 넘어서는, 세상을 향한 책임과 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크고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단체가 가진 당양한 신학적인 스펙트럼 안에는 지나치게 진보적이거나 허용적인 입장을 가진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 또한 W.C.C.의 목소리 중 하나로 인정하기 때문에 함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 정도입니다.

이번 W.C.C.의 부산 총회는 개최 전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소위 한기총이라는 단체가 이 총회를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한기총은 그 중요 구성원들이 교회 세습이나 부정, 각종 도덕적 교회적인 문제로 논란이 되어왔기 때문에 지난 2-3년 간 꾸준히 해체가 논의되어 왔고, ‘한국 기독교 총연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몇몇 보수 교단의 연합체에 불과합니다. 신학적인 정통성을 지키기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단체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공식적으로 비난과 반대를 거듭하던 한기총은 한국의 W.C.C. 대표들을 만나 반대하지 않기로 합의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한기총 내에 있던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다시 W.C.C. 반대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W.C.C.가 열리는 부산의 백스코 앞에서 총회 개최를 반대하기 위한 예배를 드렸고, 한국의 여러 대도시 중심으로 각처에 모여서 W.C.C.를 반대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가운데 구호가 난무하고 정죄와 심판이 난무했습니다. W.C.C. 안에는 한국 감리교와 성공회, 통합 교단과 침례교 일부, 하나님의 성회 일부, 합동 교단 중 다수가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다른 교단의 신앙을 정죄하고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W.C.C.를 그렇게 반대하던 교회들이 박정희 추모 예배에 대거 동참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 슬프고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교회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해왔던 한국의 보수교단이 가장 정치적인 집단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추모 예배를 통해서 W.C.C.와 관련된 사건들을 바라보면 더욱 그렇습니디. 과거 W.C.C.는 각 나라의 인권과 정의에 대해 늘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한국의 60~80년대 상황은 W.C,C,의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런 W.C.C.의 입장에 대해 한국의 보수 교단은 교회가 정치에 개입한다는 비난을 해왔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한국 교회의 슬프고도 추한 자화상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것 같지만 가장 세속적이고, 가장 비정치적인 것 같지만 권력과 부를 지향하는 모습입니다. 어느 단체를 지지하고 어느 단체에 속해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우리 안에 있는 일치를 어떻게 증거할 것인지를 정직하고 진지하고 고민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복의 근원이 되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기를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근원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허락하신 복이 그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정한 상황이나 환경이 그와 그 자손에게 허락된 사명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는 복의 근원이며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선택된 자녀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사는 일에 늘 실패를 거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교회는 다시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가는 곳곳에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참된 복이 선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복의 소식, 그것은 이방을 향한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의 소식이었습니다. 교회는 이것 하나를 전하기 위해, 이 복음이 샘솟는 참된 근원이 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고난과 핍박도 유혹과 시험도 복의 근원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에서 성도와 교회가 믿음 위에 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는 12장에서 바울은 먼저 교회의 은사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은사를 받은 교회와 성도들이 어떤 원칙으로 그 은사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받은 은사를 사용하되 선하고 바르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미 롬 12:14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권면한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복의 근원으로서의 교회와 성도의 삶의 원칙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선하고 의로운 원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모든 억울하고 분한 일들을 당할 때에도 선한 삶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서 돌려줄 줄 압니다. 교회가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고, 그 복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들에게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2. 일흔 번 씩 일곱 번

초대교회가 견지해야 할 이러한 원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와 화해에 대한 권면인 일흔 번씩 일곱 번’(18:22)의 권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에서 결국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며 삽니다. 내가 아무리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고 경건한 척 하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사람에 대해서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좋은 예가 됩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배웠습니다. 실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한계를 아직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는 일곱 번이라는 수만큼만 자신을 속일 수 있었습니다. 그 일곱 번이 지나면 그는 다시 이전에 자신을 차지하고 있던 정죄와 판단을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 상황 속에서 과연 무엇을 사용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사랑과 은혜를 사용할 것인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죄와 판단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베드로는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으로 우리는 서로를 대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과 구원의 은혜입니까? 서로를 향한 정죄와 판단입니까? 때로 견디기 어려운 이웃과 성도를 만날지라도 우리는 은혜와 사랑의 변치 않는 원칙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습니까?

3. 네 속에 선함이 있느냐?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러한 가르침을 초대교회에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교회 구성원의 신분의 격차에서 오는 분열의 가능성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특별히 사회적 신분에서의 불평등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but also to those who are harsh)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18-20)

여기서 말하는 주인들 중에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복음을 받고 믿음으로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harsh’ 한 삶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같은 성도이면서 종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 대해 부당하고 잔혹한 일을 행할 때 그 대상이 되는 성도이자 종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베드로의 권면은 바로 성도와 교회 안에 있는 선한 삶의 원칙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증거하고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성도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한 삶의 기회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있습니다.

4. 복된 은사를 선()하게 사용하라.

교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의 근원이 됩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교회에 심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서로에게, 세상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때로 교회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은사를 사용하되 은사를 허락하신 목적을 잊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교회에 허락하신 복을 서로에 대해, 세상에 대해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허락하신 도구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사용하는 도구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도구들은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더 많은 것을 편하고 효과적으로 생산하는 일을 돕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을 상실할 때 도구는 때로는 무기로 변하고 때로는 쓸모없이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는 하나님의 복을 증거하는 좋은 도구가 되고 적절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에게 또 하나의 원칙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은사를 사용하되 자신을 위해서, 악한 방법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로서의 선한 삶의 원칙을 지키면서 은사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함께 강조하고 있는 선한 삶의 원칙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는 근거가 되며 건강한 신앙 문화의 기초가 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악을 행하고 손해를 끼칠지라도 내가 결코 선한 삶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을 때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 대해 복음으로 승리하는 길 위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고백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서로에 대해 harsh한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서로의 연약함에 대해 선한 삶의 원칙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 교회 공동체는 우리의 옛사람들의 harsh 함이 지배하는 교회가 아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허락하신 은혜와 사랑,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선한 삶으로 서로를 만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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