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27 기쁨의 공동체-27"화목하게 하는 직책" | na kim | 2013-12-01 | |||
|
|||||
2013. 11. 27. 로마서 12장 기쁨의 공동체 27 “화목하게 하는 직책”(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갔을 때입니다. 짝이 된 친구는 최창용이라는, 입학 할 때 선서를 했고, 늘 전교에서 1-2등을 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고, 나이 차이가 나는 형은 당시에는 꽤 드문 직업이었던 회계사였습니다. 창용이는 공부만 잘한 게 아니었습니다. 키도 저만했고, 잘 생겼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성까지 좋았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면 반찬이 좀 부실했던 친구들이 창용이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창용이의 도시락에는 쉽게 먹기 힘들었던 소시지나 고기반찬이 있었고, 도시락 뚜껑을 열면 두꺼운 소고기 계란 덮밥이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반찬이 좋았던 친구들 중에서는 혼자서 도시락 뚜껑으로 자기가 먹을 것을 보호하면서 먹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창용이는 그 반대였습니다. 창용이의 도시락과 반찬은 누구나 먼저 먹는 녀석이 임자였습니다. 심지어 2-3교시를 마친 후에 창용이의 소고기 계란 덮밥을 먼저 먹으려고 다투는 친구들도 있었고, 서로 규칙을 정해서 먹기도 했습니다. 결국 창용이의 어머니는 친구들이 먹을 도시락을 따로 싸주셨습니다. 저는 창용이와 친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모든 친구들에게 다 잘해주는 친구,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친구,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창용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점심 시간에 창용이 주변으로 도시락들이 모일 때 저는 일부러 다른 친구들과 자리를 붙여서 따로 먹기도 했습니다. ‘저 자식... 너무 착한 척 하는 거 아냐...?’ 이것이 당시에 창용이를 보던 저의 시각이었습니다. 짝이 된지 한 두달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창용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야, 응도 너는 나 싫어하니?”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잡고 창용이에게 말했습니다. “응... 난 너 좀 싫어...” “왜?” “너는... 자식아, 너무 착한 척을 해...” “내가 뭐...?” “너는 모든 애들한테 다 잘하잖아... 나는 그게 마음에 안들어” “그게 왜?” 딱히 뭐라고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냥 마음에 안든다고...짜식아!” 창용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싱긋 웃고 지나갔습니다. 당시에 제가 창용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모든 친구에게 다 잘해주는 친구는 참된 친구가 아니다...”정도의 말이었습니다. 제 생각이 옳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갖춘 친구에 대한 시샘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한 학기가 지나지 않아서 창용이와 저는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성근이라는 또 한명의 친구와 함께 셋이서 형제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한번은 제가 창용이에게 물었습니다. “용아,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진심으로 대답해봐. 너는 애들이 니 도시락에 함부로 손을 대도 화가 안나니?” 창용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뭐...별로...” “왜 화가 안나니? 어떤 때는 니가 먹을 것이 없기도 하잖아.” “화가 안난다는 게 아니라, 화를 안내기로 한거야....” “왜?” “화를 내면 뭘해... 조금 참고 양보하는 게 낫잖아... 사이 좋게 지내야지” 생각해보면 창용이를 알고 난 후에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언성을 높이거나 그 흔한 욕설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선한 웃음과 말로 늘 친구들의 중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20대 중반에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지금은 고향 부산으로 내려와 변호사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동문 회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늘 그 친구를 생각합니다. 신앙이 아닌 잘 자란 성품으로 모두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던 친구입니다. 이제 곧 50을 바라보며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도 아직도 주변과 화목하는 능력에 어려움을 느끼는 지금, 가끔 친구 창용이 생각을 합니다. 선한 성품은 한편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며, 다른 한편 성도라면 개발하고 가꾸어야 할 성품입니다. 믿음의 연륜만큼 성품이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18~20) 바울은 고후 5:17에서 성도와 교회의 새로운 신분에 대해 선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어서 18~20절에서 새로운 삶의 목적과 방향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와 교회에 주시는 새로운 직책, 그것은 바로 ‘화목’에 있습니다. 화목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화목을 선언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을 때”(엡 4:22-23)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화목에는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형제와의 화목과 분리하려는 태도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대해 가장 경계하셨던 이원론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형제와의 관계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화목은 쌍방으로 이뤄져야 하는 성도의 직무입니다. 2. 예수님께서 화목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화목의 직책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화목이 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엡2:14) 예수님은 스스로 화목의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우리들 서로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화목케하는 직무를 외면하거나 가로막는다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산상설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화목을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직무를 성령의 은사로 소개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른 말로 하면 성도에게 허락하신 새로운 성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모든 성령의 열매를 서로 연결되어 있고, 화평은 성도가 세상에 대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것을 하늘에서 난 지혜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성경은 이렇게 다소 건조하고 담담하게 성도와 교회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직무로서의 화목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이 사역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3. 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나눈 본문의 말씀 롬 12:18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라고 말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이라는 말은 화목케하는 직책을 맡은 교회와 성도에 대한 다른 표현들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왜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믿음을 가진 교회가 살아야 할 신앙 윤리를 설명하면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로 마치 후퇴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이미 신앙생활을 계속해온 지 20년, 40년, 60년 된 우리는 어떻습니까? 1세기 초대 교회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고, 체계적으로 말씀과 예배와 기도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조직화된 교회와 신앙 체계 속에서 배우고 성장해왔습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과거의 가치관과 성품을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세상과 화목하는 아름다운 직무를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답은 단순합니다.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로마서 12장을 봅시다. 12장에서만 우리는 당시 로마교회의 상황을 몇 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교회 내부적으로는 각종 은사로 말미암아 서로 자신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 외부에서 오는 환난과 핍박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 내외적인 문제들에 대해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6-17)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겸손과 선함)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18절에서 설명합니다. 이 사역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성도와 교회에 맡기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가 서로에 대해 더 낮은 곳에서 섬기고 헌신하며, 교회 밖에서 밀려오는 모든 환난과 핍박에 대해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할 때 교회와 성도는 허락하신 직책을 잘 감당하고 있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4. 예수를 품고 세상을 보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라는 표현입니다. 화목하게 지낼 사람들을 선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화평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할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슴 속에 있다면 화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내가 아닌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택합니다. 예수를 품고 이웃을 볼 때 모든 이웃은 우리의 화목케하는 직책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사용해야겠습니다. 나의 성품이나 판단이나 상처가 아닌 내 안에 있는 믿음이 일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할 새사람이 선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자기 안에 있는 두 인격을 고민했습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옛성품이 남아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남은 옛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귀한 직무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사람, 새인격이 선택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이 나를 결정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현실은 늘 우리들에게 “안됩니다.” “어렵습니다.” “못합니다.”의 대답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들에게 책임을 지도록 인도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감으로 세상에 화목의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는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