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아름답다! | 김나래 | 2020-06-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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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1:14절 개역개정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초대교회 수요예배 * 본 문 : 요한복음 1장 14절 * 제 목 : 예수님은 아름답다! 어릴 때 제가 아버지에 대해 하던 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부지 머하시노?”라고 물을 때, “우리 아부지 목산데예...”라는 대답을 했고, 둘째는 “아부지 어디 계시노?”라고 물을 때 대부분 저의 대답은 두가지였습니다. “심방 가싰는데예”아니면 “설교 준비하심미더”였습니다. 늘 바쁘게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셨던 분이셨고, 사실 자녀들을 그리 살갑게 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크던 당시에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유년의 기억 중에서 밝고 즐거운 것이 하나있습니다. 제가 지금 승하만 할 때 아버지께서 저와 축구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의아버지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으십니다. 한번은 목회자 체육 대회에서 아버지의 축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잘 하시더군요. 최종 수비수셨는데, 소위 똥볼을 한번 차면 반대편 골대까지 가는 대단한 힘이었습니다. 그날은 아버지, 그리고 작은 형과 함께 해운데 바닷가 앞 공터에 가서 오후를 신나게 놀았습니다. 어린 아들 둘에게 공차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함께 놀아주신 기억 - ‘아버지...’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 늘 마음에 차오르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제게 왜 아버지의 좋은 기억들이 없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제게 신앙을 가르치셨고,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소중한 기억들 중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기억은 아버지께서 눈높이를 어린 아들에게 맞추고 함께 뛰고 땀을 흘려주셨던 때입니다. 눈높이가 맞춰질 때 비로소 마음의 높이도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같은 눈높이와 마음의 높이로 아버지를 만났던 소중한 기억이 오늘날 저의 아버지됨의 좋은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살갑게 놀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은 어디쯤 계십니까?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과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느라 늘 바쁘실까요? 항상 잠시 그림자만 보여주시고 어디를 그렇게 다니고 계실까요? 아니면 여러분과 함께 살면서 뒹굴면서 눈물 흘리시면서 기뻐하시면서.... 오늘 여러분과 동행하시는 분일까요? 1. 영광의 이유 (1) - 낮아지심 오늘 말씀의 제목을 ‘예수님은 참 좋다.’ 혹은 ‘예수님 짱!’ 뭐 이렇게 하려고도 생각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아름답다’로 정했지만 사실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제목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그의 생각과 삶이 아름답습니다. 그의 눈높이와 마음의 높이가 아름답습니다. 그의 낮고 낮은 발걸음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왜 굳이 예수님을 아름답다고 표현할까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으로서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 즉 절대진리가 사람, 즉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순과 거짓의 시간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진리가 거짓 안에 임했다는 말이고, 진리의 형형한 눈빛이 거짓의 비겁한 마음에 임했다는 말이고, 진리의 사랑하는 마음이 거짓의 증오와 분노의 마음에 임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역사에 하나님의 가장 적극적인 개입이 이뤄졌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사람의 역사를 강제적으로 바꾸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고 삶의 목표와 과정과 결과를 바꾸었습니다. 인간의 시간에 가장 적극적인 개입을 하신 일이고, 그 결과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칭찬입니다. 저는 이것을 아름답다고 말했고, 성경은 그것을 ‘영광과 은혜와 진리와 충만’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뭐...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이것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2. 영광의 이유(2) - 자신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이후 인류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건을 연속으로 경험합니다. 성육신을 이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사건은 예수님의 삶 전반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나셔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세 번에 걸쳐서 시험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고도 하고,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도 하고,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유혹과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그런 시험은 예수님이 사역하는 동안 계속되고, 나아가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해보라.”는 유혹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는 해결한다고 하면서 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가 하는 조롱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서 예수님과 고민하는 한 청년으로서의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서 함께 만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 확신과 하나님의 대한 믿음으로 흔들림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고민하는 한 사람의 청년이었습니다. 전에 누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예수님이 신이라면 십자가의 고통이 무슨 고통이겠는가? 그 정도의 고통은 충분히 제거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철저하게 무지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 동안에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하나님이셨던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안위나 필요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려 하거나, 자신의 위험과 위기를 피하려 하거나, 분노나 염려하는 일에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의 의를 드러내는 일에, 불쌍히 여기심과 사랑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우리들을 섬기시기 위해 사용하신 주님, 이것이 삶으로서의 참된 아름다움입니다. 3. 영광의 이유(3) - 가시와 면류관 세 번째 우리 주님의 아름다우심은 가시 면류관에 있습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가시는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닌 죄의 결과와 관계가 됩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창 3:17-18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7-18) 가시덤불은 죄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33:55에도 가시가 상징적으로 등장합니다.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3:55) 원주민들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죄라면, 그들이 가시가 되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나아가서 가시는 열매 없는 삶, 죄인의 삶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잠 22:5)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 가시나무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거니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시로 만든 관을 쓰셨습니다. 우연일까요? 성경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이, 우리의 삶의 더럽고 추한 모습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로 박혀 있습니다. 머리는 영광과 권위의 상징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머리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영광과 능력이 있지 않겠습니까?예수님은 바로 그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이, 부끄러움과 연약함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로 박힙니다. 피가 흐릅니다. 영광이 아닌 조롱으로, 권위가 아닌 비난으로 씌워진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이 아닌 수치와 고통의 피가 이마를 흘러 눈물과 함께 가슴을 적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신 것은 단순한 ‘가시로 만든 관’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그 머리에 가장 치욕스러운 죄의 열매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모든 죄를 그 머리에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 우리들을 그 머리에 쓰셨습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고통과 수치를 관으로 쓰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만든 가시를 면류관으로 쓰신 예수님의 머리입니다. 4. 영광의 이유(3) - 나를 위해 하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우리 주님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그림에 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내가 만질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시간의 한계 속에 갇히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연약하고 병든, 죄인들을 위해 능력과 영광을 사용하셨습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죄인들의 모든 죄와 허물의 결과를 그 머리에 관으로 쓰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분 아닙니까? 멋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만일 ‘그림의 떡’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그런 아름다운 삶과 모습이 나와 상관없이 이루어 진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예,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님이 하신 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모든 일을 나를 위해, 우리들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종으로서의 섬김과 십자가와 가시 면류관은 여러분과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객관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나를 위한 사랑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 예수님은 그 마음과 삶에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시고,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들의 어두운 삶을 밝히고 우리들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를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그 주님이 바로 우리의 친구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와 하나 되시는 분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더욱 아름답고 날마다 더 거룩해지는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아름다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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