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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11. 한국 전쟁과 교회(에스겔 37:15-17) 김나래 202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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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 교회사 특강 44                                        2023. 3. 8. 

                                                             

 한국교회사 - 11. 한국 전쟁과 교회(에스겔 37:15-17)

  

찬송가 : 312.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구)341장], 516. 옳은 길 따르라 의의길을 [(구)265장]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으며, 국제적 갈등은 극대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유럽 전 지역에 투하된 폭탄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이 투하되어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남한군 22만 명, 북한군 60여만 명, 중공군 100만 명, 미군 14만 명, 유엔군 1만 6000여 명의 사상자가 났으며, 전쟁 중에 병으로 사망한 숫자를 포함하면 250만 명이나 되는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남한 50만과 북한 300만의 민간인 사망자를 합치면 600만의 피가 이 땅에 쏟아진 것이다. 그리고 300만 명의 피난민과 2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브리태니커백과사전) 

 

1. 분단과 교회

 

1945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후 제국주의 열강이 재편되던 국제정세와 독립과 해방을 잘 준비되지 못했던 국내상황으로 인해 한국은 분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후 각각 친미 친소 정부가 수립되고 한민족 간의 내전인 것처럼 시작된 전쟁은 3년 1개월 을 끌면서 소련과 중공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과 미국과 유럽국가들 중심의 자유 진영이 맞붙은 최소의 국제전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20세기 후반까지 세계는 두 진영간 강력한 냉전 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1953년 7월 북한의 김일성과 미군정은 휴전을 합의하였고, 이후 남한과 북한 모두 양 진영이 맞서는 최전선의 국가 체제를 형성하게 됩니다.  북한은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공산당 정권이 지금까지도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남한의 경우 해방 정국에 나타난 중도파나 좌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친미 극우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우파가 내세운 반공 이데올로기는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토론이 불가능한 국가 이념이 되었고, 그것에 대한 도전은 국가 전복이라는 반역 행위로 취급당했습니다.

 

해방 직후 좌우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에 한국교회는 기본적으로 반공 입장을 취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에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뉴욕의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에 북한의 남침 사실을 알리고, 미국 및 국제 종교 기구들의 긴급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Statement on the Korean Situation and World Order)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막바지에는 ’북진 통일 기원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한국기독교연합회 주최로 인천과 청주, 광주 등지에서 열린 이 집회를 통해 한국교회의 휴전 반대 입장을 세계 교회와 미국 대통령 등에게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 한국교회의 트라우마

 

한국전쟁으로 남북한 양편에서 최소 5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한반도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948개 처소의 교회당과 기독교 관련 시설이 피해를 봤습니다.  1957년 발행된 ‘기독교 연감’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2년 6월 25일 시점에 목회자 400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북한에서만 장로교 교역자 240명, 감리교 교역자 46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폭력성과 파괴는 한국교회에 집단적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휴전 이후 한국교회는 더욱 강고한 반공 입장에 서서 북한을 적대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 사회가 경험하는 다양한 사회적 국제적 현상들에 대한 입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해방 이후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기독교 청년단체들의 극우적 테러행위들이 신앙과 반공의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서도 신앙과 반공은 교회의 눈과 귀를 가리는데 역할을 합니다.  이후 쿠데타로 4.19 시민 혁명의 성과를 짓밟고 정권을 장악한 군부 정권에 대해서도 교회는 침묵하고 기도하고 동조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베트남전쟁에 군인을 파병하는 데에도 적극적인 신앙적·이념적 당위를 제공했습니다. 한국기독교연합회의 '파월 장병을 위한 전국 기도회' 권고문은 "공산 침략의 쓰라린 경험"을 가진 한국이 현재 반공전선 제일선에 서 있다면서 베트남 참전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 한국교회의 권고는 일제시대 한국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나가라고 독려했던 일제 치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같은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후 베트남 전쟁의 실상이 밝혀지고 미국의 패배가 결정된 후 한국 교회는 그 당시의 결정에 대해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국 전쟁이 교회에 남긴 상처와 상처에 근거한 정치적 결정들이 과연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과 갈등에 대해서도 한 가지 입장만을 고수함으로 말미암아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부채를 안게 됩니다.

 

3. 전쟁이 만든 한국 교회의 역사의식

 

물론 한국교회의 과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전쟁의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국제 선교 단체들과 연계하여 교회를 재건하고 교회를 통해서 제난 속에 허덕이는 이웃을 위한 구호사업을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는 미국의 절대적 원조와 도움 속에서 한국교회는 대단한 부흥과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시기 부흥과 성장은 주로 외적인 요인에 기인했다고 불 수 있습니다.  첫번째 원인은 이북 기독교인의 유입입니다.  이들은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서 남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북인들은 남한 교회에 신앙 열정과 자립정신, 또한 전도열정을 제공하였습니다.  둘째로 전쟁의 끔찍한 경험이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을 증진시킴으로써 기독교에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셋째로 수많은 구호 사업이 교회에 의해서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구호 사업은 교회에 좋은 이미지를 사회에 제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 교회에 다음과 같은 몇가지 성향이 뿌리내립니다.

 

1) 반공사상

 

한국 개신교의 반공적 정체성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좌익 세력의 반기독교 운동의 경험 속에서 태동·발전하였으며, 해방과 분단을 거치며 강력한 반공의식을 지닌 월남 그리스도인들이 남한 교회에 유입 정착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반민족적이고 비국민적인 '사탄'과 동일하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교조화했습니다. 또 기독교의 반공 노선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기독교적 가치를 일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적 국가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와 결합된 본능적 혐오와 적대의 정서는 이후 한국교회와 사회 속 소수의 목소리나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는 폭력성과 억압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빨갱이'라 불리는 차별의 언어는 또 다른 차별을 합리화하고 확대재생산하는 근거이자 메커니즘이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만연한 반공사상과 혐오, 적대의 정서를 그리스도의 복음과 열린 신앙을 통해 극복해야 할 역사적 책임과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2) 물신주의

 

전쟁 트라우마는 정치적 측면에서 반공주의, 경제적 측면에서 기복신앙 혹은 물신주의와 결합해 강력한 화학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는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로 무장된 메가 처치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는 기독교의 근본정신과 토대를 위협하는 물신숭배로 이어집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물신숭배와 성공지향적 신앙은 더욱 고착화되었습니다. 

 

3) 친미성향

 

한국전쟁 이후 국제 관계에서 한국의 경제는 미국에 철저히 의존하면서 자립적 발전의 길이 점점 봉쇄되고 종속적 발전의 가능성만 남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한국의 은인'이며 세계 최강 대국인 미국을 추종하면서 서양 문화, 특히 미국 문화가 여과 없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한국전쟁은 ‘친미’-‘반공이념’-‘물신사상’-‘성과주의’-‘민주주의’를 연결하는 시발점이 됩니다. 

 

4) 정교 유착

 

해방 후 한국교회는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도 이승만 정부와 긴밀한 밀착관계를 형성했습니다. 1952년 실시된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각 교파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들을 선임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전국 3500여 교회에 위원회를 조직, 선거운동을 지원키로 한 후 "기독교인의 대통령" 이승만에 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정교 유착의 민낯은 1960년 4·19시민혁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으나, 이후로도 군부독재 정권을 정당화하는 조찬 기도회 등을 개최하며 국가 권력으로부터 여러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5) 교회 분열

 

한국전쟁이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내부적 갈등과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신파 분열(1951), 기장·예장 분열(1953), 예장합동·통합 분열(1959)의 역사적 사건들이 한국전쟁 진행 과정 중이나 직후에 전개된 점을 보면 한국전쟁이 한국교회 분열에 간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전쟁은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역사적 부채와 모순의 결과였습니다. 1950년대 전개된 한국교회의 분열 사건들 또한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변절과 권력화가 낳은 예고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한국교회의 역사적 과제

 

그동안 한국 전쟁과 관련한 교회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많은 연구들이 전쟁 중에 있었던 구호 사업, 자선 사업 등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한국전쟁 당시 전개된 기독교인들에 의해 자행되었거나 기독교인들에 대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전쟁 당시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메노나이트의 평화운동 등도 함께 다뤄야 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강성갑’이나 ‘서기훈’ 같은 좌·우 어디에도 경도되지 않고 기독교 신앙에 따른 제3의 길을 모색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안적 연구도 모색되고 있습니다.

 

한반도, 좁은 땅덩이를 나누고 있는 동족이 계속 분단과 갈등의 상황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화해와 공존은 냉정하고 진지하게 역사의 진실을 대면하고 서로의 과오나 한계를 인정하고 손잡을 때 가능합니다. 갈등과 반목의 시대를 지나 공존과 화해,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오늘날 우리가 한국전쟁의 비극적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가 보여 준 부끄러운 얼굴을 거울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그 시대 속에서도 평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했던 소수의 대안적 겨자씨의 역사들을 발굴하고 추적하면서 우리 또한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길로 나가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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