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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수의 악순환 이응도 목사 201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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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수의 악순환

김집사님은 한국에 있을 때 작은 사업체를 가진 사장이었습니다. 인정 많고 성실하기도 소문났었습니다. 경제적인 능력도 있어서 많은 친척들이 김집사님의 신세를 졌습니다. 그 중에 손 아래 처남은 특히 큰 신세를 졌습니다. 여러 번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사업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던 처남은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했고 김집사님은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비용을 무상으로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남아 있던 빚까지 정리해 줬습니다.


90년대 말 한국에 IMF로 인한 경제 위기가 왔을 때 김집사님도 사업체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자녀들을 데리고 교육 환경이 좋다는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먼저 건너온 처남이 있었기 때문에 든든했습니다. 처남은 미국에서는 그래도 제법 성공해서 세탁소를 몇 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집사님과 아내는 처남이 이전에 자신들에게 신세 진 일을 잊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처남에 대한 기대는 미국으로 건너오던 날부터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남의 세탁소는 늘 일손이 딸렸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쓰지 않고 가족들이 일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김집사님과 아내는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세탁소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첫날부터 온갖 무시와 핀잔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어휴…. 그렇게 하면 어떻게… 줘봐…. 맡긴 내가 잘못이지….”


“나원… 이것도 못해서 어떻게 미국에서 살겠다구….”


“아니, 그렇게 영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미국에는 왜 왔어요? 쯧쯧쯧….”


“뭘 안다고 그래요…. 시키는대로 해요….”


“그래도 고마운 줄 알아요. 우리 때는 누가 도와준 사람이나 있는 줄 알아요?”


“다 그렇게 고생하는거예요. 그래도 우리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차를 살 때도, 집을 얻을 때도, 전기와 전화를 신청할 때도 한참을 늦게 도와준 처남댁과 조카들은 무시와 경멸의 말투를 달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고 도와준다는 이유로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입니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몰래 물어 보았더니 김집사님 부부는 두 사람이 일하고서도 한 사람 몫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집사님은 조심스럽게 임금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처남은 화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여주고 일시켜 줬더니 못하는 소리가 없군. 이 공장에서 영주권이나 받으려면 알아서 해!”


결국 일년 반을 그 공장에서 일하던 부부는 처남네와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고 일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부터 사람 좋던 김집사님의 눈빛이 바뀌었습니다. 김집사님 부부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각각 일터에서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복수할겁니다. 꼭 보여주고 말겁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늘 웃던 김집사님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입에는 복수라는 말이 늘 붙어 있습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직장과 집을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정작 미국에 온 것인 자녀들 때문이었는데 종일 자녀들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할 시간조차 가질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김집사님은 직장에서 돌아오다가 경미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범퍼가 조금 찌그러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김집사님을 부추겼습니다. 한 건 잡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집사님은 교통사고 소송 전문이라는 유태인 변호사에게 찾아갔습니다. 2만 5천불을 받아냈습니다. 김집사님은 비로소 뭔가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이민 사회에서 살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는 소위 말하는 ‘복수의 악순환’이 반복될 때입니다. 그것도 자신에게 해를 끼친 바로 그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복수가 아니라 나보다 늦게 이민 온 사람,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불특정한 다수에게 자신이 받았던 서러움과 불이익을 되돌려주는 경우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받는 작은 불이익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조금이라도 무시를 당하거나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지나칠 만큼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명예나 체면, 혹은 자존심이나 이익에 작은 흠이라도 생기면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큰 불이익으로 갚아주게 됩니다. 아니 내가 피해를 입은 바로 그 사람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누구라도 나를 자극하기만 하면 그 동안 내 안에 쌓여 있던 모든 분노와 복수심을 한꺼번에 쏟아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민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라고 해서 이런 이민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성에서 그리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가진 능력, 우리를 죄와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하며 모든 죄책감과 억울함과 분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능력은 구체적인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 예수를 믿지만 그 믿음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만 역사할 뿐 다른 사람과의 관계, 나의 정서적인 평안에 대해서는 깊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받은 상처와 아픔이 더 크게 증폭되고 재생산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이민 사회와 이민 교회의 아픔은 점점 깊어지고 서로가 주고받는 아픔의 강도도 커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아픔이 우리의 삶과 관계를 결정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김집사님은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배워버린 ‘상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돌이켜서 ‘복음 중심적인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은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의 선택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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