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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들 이응도 목사 201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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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들


한국 이민 사회만큼 좁은 사회도 없다고 말합니다. 소위 “한 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알고 보면 한인 사회만큼 서로의 거리가 먼 사회, 높은 담을 쌓고 사는 사회도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들이 늘 만나고 부대끼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수많은 다른 민족과 함께 살아가는 이민 사회에서는 굳이 갈등이 있는 사람들을 매일 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에 놓여진 높은 담을 그리 부담스러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먼 물리적인 거리 속에 숨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상담을 하다 보면 5년 묵은 상처, 10년 된 원수된 관계, 15년을 만나지 않고 지내는 형제들, 그리고 20년이 넘도록 고통 당하고 있는 기억들을 가지고 사는 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한인들이 먼 이국 땅에 와서 살면서 서로를 향한 높은 증오의 담과 두터운 경계의 벽을 두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왜 10년, 20년이 넘은 오랜 과거가 오늘의 현실의 정서와 내일의 관계를 결정하고 있을까요? 저는 그 대답 중 한가지는 분명 ‘용서하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오해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이민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사랑’, ‘용서’, ‘희생’ 등의 단어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데 매우 익숙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과 용서를 해야 하고, 지금 내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까… 나는 저절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H권사님은 나이 20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셨고 이제 60이 넘어선지 오래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평생을 남편으로부터 구타와 욕설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H 권사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남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이런 말로 말씀을 마치십니다. “그래… 내가 그 인간 용서해야지… 우리 주님도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내가 그 인간 하나 용서 못하겠어.” 그 권사님은 정말 남편을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마음 속에는 남편을 향한 불타는 분노와 증오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만 자신의 ‘종교’가 명령하는 ‘용서하는 감정’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이것조차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란 말로 하는 것도 아니요 감정으로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잘못을 범한 그 어떤 사람에 대한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요, 더 이상 용서할 필요가 없는 상태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복해서 용서하고 또 용서했다고 말씀하시는 권사님의 용서가 참된 용서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잊었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악한 행위를 한 사람, 혹은 그 악한 행위 자체를 잊음으로 증오와 분노의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잊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어쩌면 잊는 것은 영원히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범한 잘못으로 그 사람을 영원이 묶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 중 하나는 용서를 잘못에 대해 관대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자녀나 배우자의 반복되는 잘못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가족들에 대해 단호하고 분명한 입장을 보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태도를 사랑에 근거한 용납함, 혹은 용서함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 그런 용서가 그 사람을 얼마나 크게 해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로 하여금 그런 잘못된 삶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민 사회는 지극히 가족 중심적입니다. 아니 자녀 중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민 사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자녀와의 깊은 대화가 부족한 사회이기 때문에 자녀의 잘못에 대한 관대함으로 대화의 부족, 혹은 사랑의 부족을 보완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관대함으로 용서를 가장하고 무관심을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전제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러면 용서하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말일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동일한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을 ‘GUARANTEE(보장)’하라는 것은 내 앞에서 그 사람의 완전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란 그 사람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사랑과 자비에 근거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부족하다구요? 그래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그리스도의 영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자리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랑과 용서의 샘을 길어서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촉촉한 삶을 살 수 있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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