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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na kim 201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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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전도서7:15-18절 개역한글

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6. 2. 14.

 

* 본 문 : 전도서 715-18절 말씀

* 제 목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어제 저는 우연히 어떤 아버지 한 분과 자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이 고민하는 중에 털어놓은 이야기가 제게 너무 공감되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아들에게 왜 그렇게 나쁜 아빠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아들인데... 그 아들을 정말 바르게 키우고 싶었는데...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이 어긋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칠고 강한 말로 어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결국 지금 자기 뜻대로 살고 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무너져 있습니다. 후회하듯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너무 집중하다보니 아들의 잘못만 보였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 최근에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루는 승하와 성일이가 다퉜습니다. 아마도 성일이가 승하를 한 대 쥐어박았던 모양입니다. 승하는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슬프고 억울한 표정으로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가능하면 남매간의 분쟁에 아빠가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저는 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절대 반대입니다. 그래서 성일이를 불러서 폭력 금지에 대한 단호한 원칙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동생이 아직 어리니까 잘못할 수 있지만 때리는 것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성일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아하... 뭔가 교훈이 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일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아빠도 나 때린 적 있잖아.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정말 너무 당황했습니다. “이 녀석아, 아빠가 언제 너를 때렸니?” 성일이가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정확하고 자세하게.... 제가 반박할 수 없도록 설명했습니다. ... 기억이 났습니다. 3-4년 전이었습니다. 너무 고집을 피우고 떼를 쓰는 성일이에게 너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6살 꼬마 성일의 머리를 쥐어박았습니다. 그 때 성일이가 얼마나 놀라는 표정이었는지, 성일이의 눈이 얼마나 커졌었는지 기억이 났습니다. 성일이는 제가 화를 못이겨서, 울면서 그만 하고 싶다는 어린 성일이에게 한 시간을 넘게 두 손을 들었다 내렸다 벌을 세운 일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자녀들에 대한 체벌이 교육적이지 않다고 늘 주장했던 저인데... 제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네가 틀렸다는 판단, 내가 옳다는 고집이 자녀에 대한 거절된 기대와 만날 때 내 사랑하는 자녀에게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1. 왜 그랬을까?

 

얼마 전에 한국 사회를 경악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놀라셨을 것입니다. 부천에서 한 목회자가 자기 딸을 구타해서 숨지게 했고, 시신을 1년간 자신의 집에 방치했습니다. 독일에서 유학을 한 신학자이고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왜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까요? 사람들은 그가 믿음이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말하기도 하고, 가짜 목사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격장애로 그의 행동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 맞을 수 있고 다 틀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의 추이를 계속 주목해서 보면서... 어쩌면 그와 제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딸을 구타할 때 정말 죽이고자 했던 의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딸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많이 방황했던 것 같습니다. 새어머니와도 관계가 힘들었나 봅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딸을 바르게 가르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만 좀 많이 화가 났고, 그것이 절제되지 않았습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딸... 때려서 바르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죽어 있는 딸을 발견한 것입니다.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정말 말도 안되게... 기도라도 하면 딸에 살아 돌아올까? 혹시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줄까...? 어느새 딸의 생명을 빼앗은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보면서 그는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런데 지금 다시 해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그때 미치도록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옳고 너는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연히 저와 그의 차이, 제가 지난 주에 만난 분과 그의 차이는 큽니다. 행위의 과정과 결과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은 말씀드린 내면의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에게는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것은 정의롭고 옳습니다. 그런데 때로 내가 그 원칙과 지나치게 동화될 때가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이 원칙이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내 가까운 사람들이, 사랑하는 내 자녀가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단단하고 엄격한 말로 통제하려 합니다. 안됩니다. 말이 거칠어지고 날카로워 집니다. 안됩니다. 체벌을 가합니다. 역시 안됩니다. 저주의 말과 단절의 말을 쏟아냅니다. 자녀의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됩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는 가장 사랑받아야 할 대상에게서 가장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처를 주는 주체가 부모인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요? 왜 부모가 자녀에게, 왜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그런 악한 일을 하게 될까요?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생각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생각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 바리새인들을 만나시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많은 바리새인들을 만났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이 틀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Q.T.를 하는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볼까요? 먼저 누가복음 5~7장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전통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 세리와 과부와 같은 죄인들을 친근히 대하는 것... 모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전통은 삶의 원칙이자 가치였습니다. 그들 자신이 전통이 되어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그들 중에서 복음에 좀 더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그가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10:25)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에게 성경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는 신명기 6:5의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10:27)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36절에서 바리새인의 질문을 뒤틀어서 돌려주십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10:36) 바리새인은 자비를 베푼 사람, 즉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영생을 물었던 이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는 복음에 순종할까요? 전통을 택할까요?

 

3. “이것을 행하고 저것을 버리지 말라!”

 

12장에 보면 예수님은 다시 한번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좀 삐딱하십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 행동은 유대인의 전통에 어긋납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불편한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누구를 초대한 것일까요? 표면적으로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지만 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복음의 논쟁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11:39-42)

 

예수님은 여기서 그들에게 지나친 것이 무엇이며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율법과 전통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종교적 의무를 다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외면하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처럼.... 모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강도만난 이웃을 외면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적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그들 안에 재물이 고여 있는 재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 안에 고여 있을 때에는 탐욕이 되고 죄악이 됩니다. 하지만 41절의 말씀처럼(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구제하는 일에 사용하면 달라집니다. 공의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됩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종교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정죄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게 있는 재물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했을까요? 45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이런 말씀들을 모욕으로 받아들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11:45) 그들은 예수님을 적대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11:53-54)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했고, 예수님을 판단했고, 정죄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4. 의인의 함정

 

오늘 전도서의 본문 말씀을 보시면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그저 중간만 가라...’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진리 위에 서 있어야 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15절 말씀을 먼저 봅시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7:15) 지혜자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더니 스스로 지혜 있고 의롭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궁금했습니다. 왜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들이 무너졌을까요? 16절을 봅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7:16) 답은 바로 지나침에 있었습니다. 아니.... 진리를 따르려고 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일에도 지나침이 있을까요? 진리는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율법과 전통에 대한 철저한 삶을 자신들의 의로 삼았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공의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15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자기의 의로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 때문에 멸망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쉽게 교만하고 쉽게 자신을 의롭게 여기며 쉽게 의인의 함정에 빠지는 우리들은 어떻게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혜자는 그들에게 권면합니다. 먼저 16절에서 지나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의로움은 너무 지나쳐서 메시야까지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교만했습니다. 어리석어서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의 가능성과 어리석음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찌르는 자기 확신 가운데 지나침의 오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잡고 무엇을 놓지 말까요? 전도서의 본문에서 잡아야 할 이것과 놓지 말아야 할 저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이것과 저것이 명확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지나치게 붙들고 있었던 이것은 무엇입니까? 율법과 전통에 대한 그들의 헌신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나치게 의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저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이것만 보고 저것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이 율법과 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그들 자신들이 율법이 되고 전통이 되었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심지어 메시야까지 그들은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의에 대해 지나치지 않을 수 있고, 이것과 저것을 함께 붙들 수 있을까요? 18절에서 지혜자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말씀이 완전한 것이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완전한 것이지 진리 앞에 있는 우리는 한 없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지만 우리는 늘 부족하고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교만하고 이웃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에 대해 겸손하며 이웃에 대해 가진 것으로 구제하고 공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우리 공동체에 중요한 고민과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우리들에게, 나에게 결핍 혹은 지나침은 없을까요? 매일 반복되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 심각한 영적인 결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간과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혹시 우리들에게 지나침은 없을까요? 이 지나침 때문에 나의 결핍에 대해 점점 무뎌지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고민하면 좋겠고,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붙잡고 저것을 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권면이 부족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인도하는 복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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