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휼" | na kim | 2016-03-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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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4:14-16절 개역한글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2016. 3. 20. * 본 문 : 히브리서 4장 14-16절 말씀 * 제 목 : 체휼 요즘 SNS가 발달하면서 사람들마다 자신만의 아이디를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의 아이디는 그 사람의 생각이나 철학이 숨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아이디는 추억의 한 부분이 표현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아이디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자주 글을 남기는 한 사이트에 새로운 글을 등장했습니다. 참 글을 맛깔스럽게 잘 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풍부한 감성과 맑은 영성으로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어려서부터 심각한 신체적 장애가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장애가 자신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은 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사이트에 접속하는 많은 사람들과 마음과 삶을 나누기를 원한다는 말도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만날 그분의 글에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Love of Tears'라는 아이디를 썼습니다. 참 좋은 아이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뜻밖에도 자신을 ‘Joy of Smiles'라고 소개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Love of Tears님의 삶이 너무 슬퍼 보이고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글의 마지막에 “새해에는 더 이상 'Love of Tears'의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Joy of Smiles'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란다.”고 격려(?), 혹은 충고를 했습니다. 저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Love of Tears’라는 아이디를 쓰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정황과 선입관으로 판단해버렸습니다. 아마도 장애를 가진 성도이기 때문에 눈물 많은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혹은 자신은 어려운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에서 승리와 기쁨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 당신도 그렇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표현했다는 겁니다. 자기 확신이 지나쳤던 것입니다. Joy of Smiles라는 분의 글을 올라오자마다 Love of Tears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닉네임은 슬프거나 우울한 의미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글을 그 사이트에서 지우고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저는 성도들의 위로가 참 아프게 표현되는 것을 봅니다. “아휴... 어쩌면 좋아...”라는 말 다음에 표현되는, 우리의 선입관과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과 눈물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내 마음은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조롱하고 정죄하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타인의 삶에 대해 내가 고통을 느꼈다면 가장 지혜로운 태도는 함께 눈물 흘리는 것이지 그의 슬픔과 아픔을 해석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왜곡되어 해석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는 분의 마음과 삶을 내 입장에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의 가장 좋은 친구는 같은 마음으로 나누는 슬픔입니다. 눈물과 고통이 많은 세상을 삽니다. 판단이 아닌 공감, 정죄가 아닌 동참의 지혜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소망이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매일 실천되는 덕목이 되면 좋겠습니다. 1. 먹어요, 먹어도 돼요! 지난 주에 시애틀 지역에 있는 두 교회 중에서 첫 번째 집회를 마치고 신문 원고를 썼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페이스북에도 올렸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글을 읽었습니다.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그 글을 복사해서 보내시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어쭈었더니 제가 글을 쓴 바로 그 내용의 문제가 지금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연세가 많은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음식을 많이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친교를 하면 늘 문제가 생깁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면 어느 한 분이 항상 과하게 음식을 권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뇨가 있고 고혈압이 있는 권사님에게 자신이 준비해 온 음식을 드시라고 권합니다. 권사님은 의사인 아들이 그런 종류의 음식은 먹지 말하고 했다고 사양합니다. 음식을 권하는 집사님은 이 정도는 괜찮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드시라고 강권합니다. 결국 권사님은 불편한 마음으로 몇 조각 드시고 불편한 몸이 되어 돌아갑니다. 이런 일이 매주 반복되자 권사님은 교회 나가는 일, 그리고 친교에 참석하는 일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 집사님은 악하거나 불편하게 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자기 입장에서 권사님을 생각한 것에 불과합니다. “드세요, 괜찮아요... 소화제예요.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 없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이런 말들은 때로는 친절을 넘어서 불편함으로, 불편함을 넘어서 피해로 넘나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두 번째 세미나를 준비할 때 점심 식사가 좀 늦어서 2시 쯤 마쳤습니다. 목사님들과 분식집에 갔었는데, 맛이 있어서 면을 좀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5시에 한 권사님이 식사 대접을 한다고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시애틀 가까이에 있는 훼드럴웨이에서 제법 좋은 한식당으로 갔습니다. 낮에 먹은 면이 불어서 배가 더부룩한데.... 대접하시는 분의 마음을 생각해서 점심 먹은 지 3시간 만에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 말고 다른 강사 한분은 라오스 선교사님이었습니다. 권사님은 필라와 라오스, 멀리서 온 분들을 마음껏 먹이고 싶어하셨습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고 했습니다. 극구 말렸습니다. 안타까워하는 권사님은 말리고 말려서 된장찌개를 먹자고 했더니 결국 한정식을 시켰습니다. 종류가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밥을 남기기가 뭐해서 결국 한 공기를 다 먹었습니다. 휴... 이제 의무방어를 끝냈구나... 생각하는 순간 뭔가가 제 앞에 떡~ 떨어졌습니다. 밥 한 공기였습니다. “목사님, 키도 크신데 더 드세요.” “선교사님, 라오스 돌아가면 잘못드실텐데 드세요.” 그 선교사님과 저는 사양하고 또 사양했습니다. 드세요드세요드세요... 더 드시면 좋을텐데.... 젊어서 소화가 잘 될 거예요... 더 드세요... 좀 더 드세요... 속에서는 정말... 죽을 지경인데, 자꾸만 권하시는 권사님을 거절하는 일이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결국 사람 좋은 선교사님은... “그러면 권사님, 제가 정말 조금만 먹을께요...”하면서 한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미나를 진행해야 하는데... 속이 불편하면 안되니까.... 끝까지 거부했던 저는 권사님의 “더 드세요.”라는 말과 눈총을 계속 견뎌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선교사님은 계속 속이 불편했습니다. 2. 내가 사랑하는 방식 저는 그 권사님의 “드세요!”라는 말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할머니에게 음식을 권하던 젊은 여집사님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Joy of Smiles라는 아이디를 쓰는 분도 좀 오지랖이 넓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모든 사랑이 다 유익하거나 건강하거나 합당하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하신다면 말입니다. 때로 어떤 사랑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편애하는 부모가 있지 않습니까? 편애도 사랑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왜곡된 사랑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모두는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며,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받아주기를 강요하면서 살면 되는 것일까요? 오늘 성경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심어주신 하나님께서 참된 사랑,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습니다. 3. 십자가의 사랑, 체휼 오늘 본문을 보실까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14절에서 하나님은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은 어떻게 그 직무를 수행합니까? 제물을 사용합니다. 짐승을 죽여서 죄인의 죄를 책임지웁니다. 하나님께 짐승의 피로 예배함으로 말미암하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일을 감당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감당하는 대제사장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의 직을 다른 제사장들과는 좀 다르게 수행하십니다. 15절이 조금 어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체휼’이라는 단어가 핵심입니다. 개정개역에서는 이 단어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동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체휼이라는 번역이 더 와 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느끼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신 그분이 우리가 받는 시험과 유혹을 함께 받으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삶으로 경험하셨고, 결국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제사장입니까? 제물입니까? 예, 예수님은 그 두 사역을 완벽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나은 제사장이 있을까요? 예수님보다 더 나은 제물이 있을까요? 체휼이라는 말은 이 두가지를 완벽하게 혼자서 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바로 그런 사역 때문에 16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시고 있군요. 하나님의 사랑은 체휼하시는 사랑입니다. 타인의 연약함을 마음으로, 삶으로 경험하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사용합니다. 내 입장에서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 그를 위한 사랑을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본문에서는 한 단어로 ‘체휼’이라고 말합니다. 4. 체휼하는 사랑으로 부르심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성도와 성도도 이렇게 서로를 먼저 사랑하고 먼저 헌신하고 나의 만족이 아닌 그의 생명에 대해 헌신하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때로 우리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주님께서 먼저 우리들에 대해 그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3:8을 봅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Finally, all of you, 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be sympathetic, love as brothers, be compassionate and humble. / 벧전 3:8)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 마음의 열매는 ‘체휼’입니다. 체휼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이 이어서 계속 등장합니다. “be sympathetic, love as brothers, be compassionate and humble.” 이것이 우리주님의 체휼하시는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서 체휼하는 사랑으로 살고자하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니다. 서로 같은 마음으로 연약함을 체휼하고,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은 불쌍하게 여기며, 자신은 겸손하라고 말씀합니다. 자, 벧전 3:8의 말씀을 기준으로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3가지 예를 생각해볼까요? 말씀드린 대로 저는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사랑은 체휼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호의를 강요하는 것도 예수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선한 의도에 집중하는 것도 예수님의 체휼하시는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고난의 주간...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가슴에 품고 불쌍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한 사랑입니다. 희생과 손해가 발생하는 자리에 자신의 삶을 밀어 넣을 줄 아는 사랑입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 내가 먼저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사랑이 체휼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매년 고난의 주간을 맞이합니다. 고난의 주간은 고난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고난의 주간에 우리 주님의 체휼하시는 사랑을 결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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