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의 조건 | na kim | 2016-04-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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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8:16-20절 개역한글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016. 4. 3. ● 본 문 : 마태복음 28장 16-20절 말씀 ● 제 목 : 사명의 조건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일이 참 어려운가 봅니다. 얼마 전에 제가 과외도 하고 교회에서도 가르쳤던 한 청년이 취직을 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유학파와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포함해서 수백 명이 몰렸는데 도대체 자기가 왜 뽑혔는지 모르겠다면서 자랑 아닌 자랑을 했습니다. 자격요건을 듣고 좀 놀랐습니다. 전기밥통을 만드는 회사인데... 2개 국어를 할 수 있어야 하고, 토익은 몇 점 이상이어야 하고, 해외 연수 경험이 있어야 하고... 입사원서를 넣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은 회사가 사람을 뽑을 때도 이렇게 많은 능력과 자격을 따집니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제외시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사용된 사람들을 보면 석연찮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를 보십시오. 나이 80의 노인이 된 모세,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가 된 모세.... 세상의 거대한 힘에 밀려 주변인이 되고 만 모세를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그가 역사적 사명을 감당합니다. 위대한 사사 기드온은 어떻습니까?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고,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300명의 용사로 12만이 넘는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치는 전쟁 역사에 없는 놀라운 싸움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을 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형님들보다 못할 때,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셔서 그를 찾으시고 그에게 기름 부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된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가 위대한 사도일 때 예수님이 그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부일 때, 열정이 많았지만 겁도 많았고, 용감했지만 비겁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예를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기준이 그가 가진 능력이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연약하고 연로하고 연소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원의 사역을 훌륭하게 잘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역사의 한 축을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1. 아직도 의심하는 제자들 오늘 본문 중에서 아마도 18-20절은 잘 아실 겁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많이 인용하고 설교하고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6-17절은 어떻습니까?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17)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경험했습니다. 주님은 고난의 모든 흔적을 몸에 지닌 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아직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의심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요? 설마 부활에 대한 것일까요? 부활에 대한 의심이라면 이미 충분히 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셨고,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를 비롯해서 모든 제자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이미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을 보면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도마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다른 6명의 제자들이 함께 갑니다. 그들은 밤을 새웠지만 아무 물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날이 샐 때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바다에 뛰어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잡은 생선과 떡을 구워주시면서 제자들과 대화하십니다. 이 대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고,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마태복음 28장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의 기록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요한복은 21장의 사건 이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의심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요? 이미 부활을 삶으로 경험했고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그들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일까요? 2. 그들의 의심에 대하여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yes or no 로 대답해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할까요? 그렇다면 그들의 부활에 대한 인정... 혹은 믿음을 ‘부활 신앙’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기쁨과 감격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앞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미안합니다. 부활은 인정하지만.... 아마 그들은 지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부활은 소망하지만 그 과정은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수님처럼 살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익숙한 환경과 일로 돌아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따라갑니다. 그들에게 어려운 것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미친 소리 취급했습니다. 같은 제자들이 그 소식을 전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으십니다.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그대로 품으십니다. 그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들은 예수님과 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더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물으시고, 그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못하겠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서, 이제 적어도 베드로는 알겠습니다. 그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왜 기뻐하시면서 자신이 이름을 ‘반석’이라 지으셨는지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신앙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압니다. 제자들도 압니다. 그 신앙 고백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지 말입니다. 그 신앙을 고백하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중을 들었고,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고,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의 고백 위에, 그런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와 제자들 위에 교회를 세우신단 말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며 세상 끝날까지 증인의 삶을 살아갈 위대한 주님의 교회를 세운단 말입니까? 베드로는,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3. 약속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기드온이라는 연약하고 비겁한 사람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기드온은 당연히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기드온이 그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무엇일까요? 사시기 6:12,16을 봅시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삿 6: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삿 6:16) 기드온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이 조건이 없다면 기드온이 아무리 힘이 강해도 미디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조건이 있을 때 기드온은 300의 용사로 12만을 이길 수 있습니다. 80세 노인 모세 또한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의 능력입니까? 그의 지혜입니까? 아닙니다. 출 3:111-12를 봅시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1-12)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어렸고 적이 많았고, 오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이 간격을 어떻게 메울 수 있었을까요? 그의 능력인가요? 그의 지혜인가요? 그는 시편 곳곳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은 신실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약속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행 약속’ - 이것이 연약하고 연로하고 연소했던 그들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그들의 모든 부족함과 그들에게 허락된 놀라운 사명을 연결하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4.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베드로는 참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참 못난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 안에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끝을 알 수 없는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를 통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배신과 부인을 예언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상반된 두 개의 내면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일하셨을까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지상 대명령에 취한 나머지 그 명령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사람들... 아무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 주님의 부활의 소식에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며 조롱했던 사람들... 주님의 부활을 직접 보고 만지면서 비로소 믿었던 사람들... 고향으로 돌아가 가장 편하고 익숙한 일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려 했던 사람들... 부활하신 주님을 기쁨과 감격 가운데 끌어안고 제대로 기뻐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여전히 의심하는 자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거룩한 사명을 주십니다.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 자신들도 제대로 제자되지 못했고,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살지 못해서 허덕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명 앞에서 제자들은 한마디로 자격미달입니다. 원서조차 넣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줍시다. 그들의 부족한 자격, 수준이하의 능력, 여전히 의심하고 회의하는 그들에게 거룩한 대사명을 주시고, 그들에게 또 하나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드온에게 주셨던 약속, 모세에게 주셨던 약속, 다윗에게 주셨던 약속입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제게도 같은 약속을 주시고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성취하고 있는 약속입니다. 무엇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바로 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렸고, 성령 하나님과 함께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강을 넘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교회는 이 약속과 함께 2000년, 교회의 역사를 이어왔고, 이 약속과 함께 주님 오시는 날까지 증인의 삶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명이 단순히 제자들의 사명만은 아니라는 것 – 잘 아시죠? 바로 우리들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단순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우리 모두를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도록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할 수 있을까요... 고민하십니까? 내가 제자를, 삼고 내가 증인이 되고, 내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 의심하십니까? 자격도, 능력도 없는 내가 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교회가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까? 염려가 되십니까?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사명의 간격을 메우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약속은 무엇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으로 연로한 모세가 청년보다 더 뜨거운 헌신을 했습니다. 연약했던 기드온이 강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연소했던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어리석고 못난 제자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이 약속으로 우리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제자가 되어 허락하신 사명에 헌신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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