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그들처럼' | na kim | 2016-04-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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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21:15-19절 개역한글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16. 4. 10. * 본 문 : 요한복음 21장 15-19절 말씀 * 제 목 :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오늘 설교 제목이 마음에 드십니까? 어떤 제목으로 정할까 고민하는 중에 ‘사랑한다면 그들처럼’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검색을 해봤더니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 있고, 영화도 있더군요. 아마도 기사를 통해서 접하고 제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제 마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 주일에 나누었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씀과 지난 주에 나누었던 ‘참된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의 연장에서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다른 제자들이 결단하고 실천해야 했던 사랑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어버이날, 그리고 소나무 화분
이제 곧 5월이 오면 어버이날이 다가오죠? 저는 어버이날 하면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중학교 1학년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는데... 선물을 살 수 있는 돈이 얼마 없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일단 카네이션을 샀습니다. 몇 백원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지... 고민을 하다가 반짝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친구 부모님이 소나무 분재를 아끼시던 생각이 났습니다. 일단 화분을 작은 것으로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뒷동산에 올라갔습니다. 한국의 산에 널린 것이 소나무라서 저는 산에만 올라가면 분재를 하는 나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종일 다녀도 친구 집에서 본 예쁜 소나무는 없었습니다. 지친 저는 결국 아무 모양도 없고 특별하지도 않은 소나무를 하나 뽑았습니다. 화분에 담아서 어버이날 아침 부모님께 꽃과 함께 드렸습니다. 부모님의 표정이 묘했습니다. 사실 중학교 1학년 아들에게 무슨 대단한 선물을 기대하셨겠습니까? 다만 산에서 뽑은 것이 거의 확실한 소나무 하나를 들고 선물이라고 가져온 셋째 아들의 생각이 궁금하셨겠지요. 살짝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어머니께서 제게 물으셨습니다. “응도야, 이기 왠 소나무고? 니가 샀나?” 그때, 바로 그때...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머릿속에서 싸움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네... 샀어요.” 그 말 앞에 “화분만...”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고, 어머니는 알았다고만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벽돌색 화분만 보면 얼굴이 벽돌색으로 변하고 마음이 벽돌처럼 딱딱해집니다. 작은 소나무를 보면 내 마음에 가시가 박히는 것 같습니다. 어버이날이 되면 카네이션보다 소나무 생각이 먼저 납니다. 어버이날 부모님께 선물을 드릴 때면 괜히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혼자서 참 오랫동안 심하게 부끄러웠습니다.
작년 Mother's Day 때 어머님이 마침 저희 집에 머무셨습니다. 용돈을 드리면서 정말 한 37-8년만에 어머니께 그 일을 기억하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기억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왜 나무라지 않으셨냐고 했더니, 괜찮았다고 하셨습니다. 용돈이 부족해서 그러려니 하셨다구요... 괜찮다고, 그것도 좋은 선물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한참을 웃었습니다. 어머니와 소나무 화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난 다음, 제 마음에는 화분과 소나무에 대한 트라우마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좀 진즉에 이야기할 것을...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 삼세번의 베드로
여러분에게는 혹시 잊을 수 없는 기억, 생각할 때마다 상처가 되거나 부끄러운 사건은 없었습니까? 그야말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듯이 비슷한 일, 비슷한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일은 없으십니까?
저는 만일 천국에서 베드로를 만난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숫자가 뭘까요? 아마도 3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기억....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베드로 앞에서 하나, 둘, 셋 하고 손가락을 접어서 세고 있다면 베드로는 세 번째 손가락을 접을 때 그 사람을 때릴 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치명적이고 가슴 아픈 기억이 3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몇 번입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몇 번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부탁하십니다. 몇 번입니까? 각각 세 번씩입니다. 베드로는 이 숫자를 싫어할까요? 좋아할까요? 베드로에 대한 3이라는 숫자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실 예수님은 왜 이 숫자를 사용해서 베드로와 대화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왜 세 번 거듭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지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특히 “나를 사랑하느냐?”와 “주님을 사랑합니다.”에 사용된 ‘필레오’(사람의 사랑)라는 단어와 ‘아가파오’(하나님의 사랑)라는 단어에 대한 구별도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처음 두 번은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셨고,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이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신적이고 고차원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셨고,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으로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 번째 질문하실 때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러면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의미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런 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많이 가르쳐왔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런 해석이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언어는 헬라어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람어’라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요한이 기록할 때 헬라어로 옮겼을 뿐입니다. 또한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구별 없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고 했을 때도 아가파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딤후4:10). 요한도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에서도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합니다.(요3;35, 5:20). 따라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어떤 사랑이냐를 가지고 논쟁한 것이 아니라 세 번 거듭 질문하신 이유와 대답하게 하신 이유, 그리고 세 번 거듭 사명을 주시는 이유에 대한 묵상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3. “........ 사랑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 예수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 대화가 세 번 반복됩니다. 아마도 첫 번째 대화가 진행될 때 베드로는 조금 당황했을 것이고, 얼떨결에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물을 때 어땠을까요? 좀 정신을 차렸을겁니다. 그런데 세 번째 물었을 때 성경은 그가 근심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말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고 말합니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실까요?
예,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주님이 아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비겁했는지도 잘 아십니다. 그가 얼마나 부끄러운지도 잘 아십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님께 미안한지도 잘 아십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랑하기에 참 미안합니다. 고백하기에 참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끄럽고 못난 내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 앞에는 어쩌면 생략된 수많은 말들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드라마의 제목처럼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사랑합니다.” “제가 참 밉지요? 사랑합니다.” “저의 배신에 마음이 많이 아프셨지요? 사랑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에 너무 죄송하지만... 주님 사랑합니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대화의 끝이었다면 이 대화는 ‘사랑의 확인’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화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대화에 두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에게 있는 3에 관련된 아픈 기억을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숫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거듭 배신했던 일,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서 예수님의 사랑을 부인했던 일에 대한 기억을 거듭 사랑을 확인하게 하시면서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차마 베드로가 먼저 꺼낼 수 없었던 기억을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어루만지시고 치료해주셨습니다.
4. “이렇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베드로를 찾아오신 또 다른 이유, 베드로에게 질문하시고 대답을 하게 하셨던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고백했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사랑에 뿌리내린 사명을 주시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패배해버린 사랑이 아닌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먼저 17절을 읽읍시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전체 문맥을 통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입니다. 그리고 18절의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양을 먹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사랑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베드로, 이제 네가 해야 할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사랑입니다. 19절에서는 이 말씀을 친절하게 해석해줍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9)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죽음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말씀하고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이기는 사랑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씀을 교회 안의 리더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하실까봐 조금 걱정이 됩니다. 설마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서 아... 베드로나 사도들처럼 지도자들은 이렇게 사랑하고, 우리는 이 사랑을 받으면 되는구나.... 나는 목자가 아니라 양이니까... 이런 사랑을 요구하기만 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시는 말씀이면서 이 대화를 듣고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고 전하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면서 역사적인 모든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해야 하는 사랑, 우리들이 해야 하는 섬김,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질문을 드릴테니 대답해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 모두는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양으로 사시겠습니까? 주님의 좋은 일꾼이 되어 양을 먹이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두려움과 염려로 자기를 지키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사랑 받기만을 원하고, 두려움과 염려로 그 사랑을 쉽게 배신하는 연약한 베드로의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사랑, 십자가 위에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드리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초대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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