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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na kim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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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골로새서1:24-25절 개역한글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6. 5. 15.

* 본 문 : 골로새서 1장 24-25절 말씀

* 제 목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 143장이 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입니다.

가사를 함께 읽어볼까요?

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3.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4.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5.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여러분은 이 가사에 동의가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가사에 동의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영적인 자각과 그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우리가 많이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오히려 감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받은 은혜가 더 크고, 받은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땀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다 책임지지 않으셨다면, 가사 2절에서처럼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가 되어야 하는데, 내 지은 죄... 일부를 지시고 일부를 남기셨으니....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죄의 깊이와 죄를 감당하기 위한 고난의 정도가 너무 커서 일부를 남겨놓으시고 우리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그 남은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런 의심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우리들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what is lacking in Christ's afflictions)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부족했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 그렇다면 주님의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더 당해야 할 고통이 있는데 그것을 피하셨고, 이제 그 남은 것을 바울과 교회가 책임지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의 모티브는 바로 이 고민에서 시작됩니다.

1. “다 이루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 신 후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여섯 번째 말씀이 요한복음 19:3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일까요? “다 이루었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여, 내 영혼은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숨을 거두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신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순종하심을 통한 구원의 모든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에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을 통해 오랫동안 예언되어왔고,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도 예언되었으며,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풍성하고 충분하게 성취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 53:4-5에서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예수님의 사역을 고난과 슬픔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고난당하심 – 이것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충분하고 넘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는 자신이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현실과 그동안 복음을 위해 당했던 수많은 고난을 모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부족분을 채우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 16:24, 막 8:34, 눅 9:23, 14:27에서 반복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일까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된다는 것을 그저 믿음으로 구원받고, 만사형통하고, 무병장수하고, 극랑왕생하는 것,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각자의 삶에 해당되는 각각 다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질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남은 고난’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책임지지 않고 남겨두신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변화된 삶을 말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말하는 것이고, 각자의 삶에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지셨고, 그것은 우리를 향한 충분하고 넘치는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제 각자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 각자가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몰랐다면 그저 한 평생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살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같은 목적과 가치와 의미로 사라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삶을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일까요? 그 삶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감당하셨던 고난과 고통이 있고, 희생과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3. 거룩한 선택

저는 주님이 허락하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첫째, ‘거룩한 선택’, 그리고 둘째 ‘영광의 선택’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십자가의 삶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십자가의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실은 오랫동안 교회는 십자가 없는 삶에 유혹을 당해왔습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교회의 역사가 그랬고, 한국 교회가 그랬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내가 믿는 믿음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내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강요되는 영적인 의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선택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실까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4-25) 이 두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 받는 괴로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고난입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몸에 채웁니다. 그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고 교회를 위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 직분과 사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합니다. 바울의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삶에 있어서 십자가라는 것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거룩한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되는 것, 직분을 따라 성실하게 섬기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거룩한 뜻으로 선택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들을 어쩔 수 없이 당하는, 피할 수 없는, 피하고 싶은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고난 받는 일을 기쁘게 여기고 자신의 삶에 더 채워 넣기 위해 애씁니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함께 하는 삶은 거룩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4. 영광의 선택

그리고 그의 선택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선택입니다. 로마서 8 :17 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영광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창조주이며 구원의 주이신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는 일 – 피조물이면서 죄인인 우리는 꿈꾸지 못할 영광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영광의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과 함께 받는 영광을 허락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은 결국 천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오늘 우리의 희생과 헌신의 현장에서 항상 빛납니다. 베드로전서 4:13에서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4) 라고 했습니다. 고난에 대한 참여가 나의 거룩한 선택의 결과라면....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아서 주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바로 지금 감사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같은 고백을 바울은 빌 1:21에서 합니다. “내안에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빌 1:21) 심지어 나의 죽음까지도 주님 안에서 영광의 길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거룩한 선택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의 십자가를 향한 거룩한 선택은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는 일에는 거룩함도 없고 영광도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는 자신을 위한 삶에서 넘어섭니다.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성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섬기고 수고하고 헌신합니다. 바로 그 헌신과 수고와 희생의 현장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임합니다. 성도는 많이 수고하고 많이 희생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영적으로 경험하며 찬송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한 신앙의 선조들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거룩하고 영광된 믿음의 선택이 우리의 삶에 늘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지는 복된 삶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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