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가 되라 | na kim | 2016-05-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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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0:20-28절 개역한글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16. 5. 8. * 본 문 : 마태복음 20장 20-28절 말씀 * 제 목 : 섬기는 자가 되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참 답답하셨겠다...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소위 말이 잘 통한다...통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 20:18-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예고’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6-19)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만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제대로 소통이 되고 있었다면 제자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자신들의 결단이나 입장을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였던 살로메가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의 시작을 “그때에...”로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살로메의 이야기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마 20:20) 살로메가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했을까요? 21절을 보면 그녀는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다른 열 명의 제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매우 분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24).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 18장에서 그들은 이미 비슷한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입니까?”라는 논쟁을 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上) 예수님은 아직 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높아질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낮아질까? 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높아지기를 원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바로 그런 질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 20:22下) 너무 쉽게 대답해버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 20:23) 무슨 말씀일까요? “그래... 너희는 내가 지는 십자가를 함께 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희가 원하는 상은 내 십자가와는 관련이 없단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단다.” 자,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마음으로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 교회는 오늘 예배 후 직분자를 세우기 위한 공동의회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교회 공동체의 선택을 통해 잘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 일을 준비하는 것은 또한 사람들의 일이라 그 과정과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 수 있고, 부족함이 나타날 수도 있겠습니다. 모든 성도가 만족할 수 없는 과정과 결과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시는 주님의 은혜가 교회와 성도들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세의 실패 저는 오늘 말씀을 출애굽기의 모세의 삶을 통해서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세는 나이 40일 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큰 꿈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애굽의 지도자로 성장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영적, 민족적 자각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관리를 죽이고 한 히브리인을 구해줍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히브리인과 다른 히브리인의 분쟁을 목격합니다. 모세는 “네게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런데 그 히브리인의 반응이 무섭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주재와 법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사람을 죽였던 것처럼 나도 죽이려고 하느냐!”(출 2:14)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히브리인을 도운 것, 그들 사이에서 분쟁을 해결하려 하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건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신분이 드러나고 마음에 품었던 뜻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정말 위험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의 선택의 대상이 된 히브리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으로 거절합니다. 모세는 그들에 대해 처절하게 실패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위협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 간 목자로 살게 됩니다. 2. 실패의 원인 – 모세에게 있는 것, 없는 것 모세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가 그렇게 가진 모든 것을 헌신하고 드리려고 했는데 왜 백성들은 그를 거절했고,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내몰아가셨을까요? 생각해보면 모세는 참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그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에게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없었을까요? 먼저 그가 왜 하필이면 40세 되던 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과 사명을 드러냈을까요? 아마도 자신감이 가장 충만했을 터이고, 이정도면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못참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선택한 이때가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때와 관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맞는지, 자신은 얼마나 하나님의 뜻으로 잘 준비되었는지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고려할 점은 동족을 대하는 그의 태도입니다. 히브리인들을 모세가 왜 동족끼리 싸우느냐고 꾸짖자 “누가 너를 우리의 주재와 법관으로 삼았느냐!”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모세가 히브리 동족들을 대하면서 애굽의 왕자로서 살아왔던 삶의 태도를 그대로 가지고 대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이면 히브리인들의 지도자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 생각할 것은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역에 자신이 주인공이 될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시기도 자신이 선택하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사역 –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지지하실까요? 모세에게 넘치는 것은 능력이요, 모자라는 것은 겸손함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사모하며 기다렸다면 백성들에게 거절당하지도, 미디안 광야에서의 처절한 단련의 삶도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광야의 40년은 넘치는 것을 버리고, 모자라는 것을 채우는 과정이었습니다. 3. 40년의 절망 그는 광야 40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양들만 돌보고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광야는 특별한 곳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욕심과 이기심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엘리야가 광야에서 자신을 준비했고,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았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긴긴 4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과연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도 저라면 처음에는 원래 가졌던 이상과 뜻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권토중래를 꿈꾸며 어떻게 하든 자신의 소명이 있고, 가족이 있고, 그리고 희망을 두었던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분노에 사로잡혔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많았을 수 있습니다. 왜 나를 거절하는가?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는가?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수 있습니다.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내가 설쳤을까? 차라리 애굽의 왕자로 있을걸.... 차라리 나라도 잘 먹고 잘 살걸.... 차라리 외면해 버릴 걸.....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1년을 기다리면... 혹시 다음 한해를 더 기다리면... 하나님이 어떤 응답을 주실까? 혹시 조금만 더 있으면 이스라엘이 나의 중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혹시... 혹시.. 하는 심정으로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40년을 보냅니다. 40년이라면... 이제 나이가 80이라면... 충분히 지치고 포기하고 잊을만한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의 열정도,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나 아니면 안된다는 교만도 다 사라지고.... 이제 남은 삶을 계수하는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때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4. 게르솜, 길을 찾다. 모세는 광야 생활 중에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짓습니다. 게르솜은 ’나그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이 그 부모의 신앙의 고백인 경우가 많습니다. 게르솜 역시 당시 모세의 삶과 신앙이 묻어나는 이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지중해 주변에는 주권 국가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고, 그러한 주권 국가의 국민이 되지 못하거나 혹은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혹은 기근이 생기고 혹은 전쟁이 생겼을 때 많은 사람들은 광야로, 산으로,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았습니다. 때로 이유 없이 죽임 당하기도 하고, 때로 노예가 되기도 하고, 뜨거운 광야에서 이름 없이 죽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나그네‘라고 불렀습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낭만적인 나그네가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실패하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유랑민이요,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받을 수 없는 하찮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들을 낳고 자기 아내와 장인과 그리고 그 아들 앞에서 자신을 고백합니다.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없고, 이룬 일이 없습니다. 나는 그저 나그네입니다. 자신의 모든 지위와 자격과 기득권과 자부심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의 어근을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건너다’라는 뜻의 ‘이브리트’에서 왔다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라는 뜻의 ‘핫비루’에서 왔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다 섞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둘 다 이스라엘의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자신을‘게르솜’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비로소 ‘히브리인’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노예이며 나그네이며 애굽의 노동현장에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며, 가진 어떤 능력과 자격과 가능성도 없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면 안되는 사람,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사모하는 사람, 내가 더 높아서 더 잘나서 더 많아 가져서 가르치고 지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며 나도 노예요 나그네인데...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따라 사명을 감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재와 판관으로 히브리인들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낮아지고 더 가난하고 더 가진 것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풍성하게 가졌던 모든 것이 광야와 세월 앞에 비워지고, 이전에 없었던 단 한 가지가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겸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시고 그를 드디어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 저는 이 말씀이 함께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 모두의 마음의 중심에 새겨지면 좋겠습니다. 출애굽의 위대한 영웅이었던 모세도 ‘게르솜’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좋은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주인공이었던 제자들도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제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건설합니다. 오늘 투표의 대상이 되는 직분자 뿐만 아니라 함께 예배하는 우리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낮은 곳에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되셨으며 낮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더욱 낮은 곳에서 더욱 섬기는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되며 직분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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