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십니까?" | na kim | 2016-06-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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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9:35-41절 개역한글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2016. 6. 12. * 본 문 : 요한복음 9장 35-41절 말씀 * 제 목 : 보이십니까?
저는 김제동이라는 연예인의 팬입니다. 자기 의견이 뚜렷해서 좋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서 좋습니다. 얼마 전에 그가 진행하는 토크쇼에서 마음에 남는 이야기를 하나 봤습니다.
하얗고 고운 얼굴의 한 소녀가 엄마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엄마가 손을 들어서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옆에 앉은 딸이 곧 심장 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냥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심장이 약해서 별로 높지 않은 계단도 올라가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토크쇼가 끝난 다음 혹시 제일 늦게 나가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기 싫다고 했습니다.
김제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엄마가 이런 이야기... 다른 사람하게 하는 게 괜찮아? 싫지는 않아?” 그러자 소녀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왜 괜찮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억울해서요!”
소녀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엄마랑 지하철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어디를 가면... 저는 참 힘들어요. 그래서 노약자석에 앉을 때가 있어요. 너무 힘이 들어서 앉아요. 그런데 주변에 사람들이 저를 쳐다봐요. 너무 안좋은 표정으로... 쟤는 왜 어린 애가 저 자리에 앉는거지...? 라는 표정으로 봐요. 저는 약자고... 너무 힘들어서 앉은 건데, 사람들은 제가 건방지고 예의없는 아이라는 표정으로 차갑게 저를 봐요. 저를 나쁜 아이로 보시기 전에 왜 그러내고, 혹시 아프냐고 물어봐주면 좋겠어요. 몸이 약해서 억울한 것이 아니라 물어보지도 않고 판단해버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억울해요.”
1. 불행이 아니라 시선
그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제 마음에 지나갔습니다. 저는 비슷한 이야기들을 상담을 하면서 참 많이 듣습니다.
“내 인생에 찾아온 불행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그 불행을 당하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고 억울해요.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다지만... 익숙해지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되잖아요.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억울하고 아파요.” 김제동은 그 소녀에게 억울해하지만 말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나 아파서 이런 거예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라고 예쁘게 말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그 소녀도 알고 김제동도 알고 저도 압니다. 묻지 않고 판단하고, 불편하게 바라보는 일에 대한 책임이 그 소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예단하고 거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런 일에 대한 피해자이기보다는 가해자가 될 때가 많습니다. 왜 우리가 가해자로 자신을 느끼지 않는가 하면, 본인이 피해자가 될 때는 많이 아파하고 불평하지만 가해자의 입장이 될 때는 느끼지 못하거나 잘못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고... 또 때로 여러분이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실수를 합니다. 전문가인척 하면서 가장 알지 못합니다. 자녀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성도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웃의 아픔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나의 과거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현재의 삶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목회자라는 이름으로, 상담자라는 역할로 오히려 마음에 아픔과 억울함을 남겼던 일이 떠오릅니다. 우리보다 낮은 자리에 내려가셔서 우리를 이해하고 용납하셨던 예수님을 믿고 전한다 하면서 늘 높은 곳에서 평가하고 판단해왔습니다. 참 많이 잘못했습니다.
2. 죄 때문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만났던 한 맹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설명하고 있는 요한복음 21장 중에서 9장 한 장 전부를 이 맹인과의 이야기에 할애했습니다. 왜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9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을 나와서 제자들과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한 번도 세상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당시 유대 사회가 가진 상식으로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이 말은 당시에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보편적인 시선이었기 때문에 말 하는 제자들도, 말을 듣는 맹인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아... 정말 불쌍합니다.”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저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라는 숨겨진 의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3. 시선의 충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의 불행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맹인으로 살게 하는 엄청난 고난을 주신 이유가 예수님을 통해서 병을 고치는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마치 주인공 예수님의 퍼포먼스를 위한 희생양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인생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동일합니다. 굳이 이 맹인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라볼 때도, 38년된 병자를 볼 때도,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만났을 때도, 그리고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도 예수님은 동일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셨습니다. 놀라운 계획과 섭리가 각 사람의 삶 속에 숨어 있습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고유의 빛깔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비춰야 할 사명과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질병이, 편견이, 사람의 죄와 악이 하나님의 섭리와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은 그 때 역사합니다. 눈을 뜨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한 사람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가로막는, 다양한 의미의 어두움에 대해 도전하고 그 어두움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이 그의 삶을 통해 역사하도록 인도합니다.
맹인이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먼저 이웃 사람들이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어서 구걸하면서 살던 사람인데... 어떻게 눈을 떴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사람들은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같이 기뻐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13절을 보면 그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에게로 갑니다.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만나서 고쳐주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뭐라고?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고? 안식일을 어긴 것을 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일 리가 없어!”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자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부릅니다. 17절에 보면 그의 의견을 묻습니다. “너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는 거침없이 말합니다. “선지자입니다.” 말이 안통한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의 부모를 부릅니다. 어떻게 된거냐고 다시 묻습니다.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아들을 부릅니다. 그들은 24절에서 정말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 무슨 말입니까? 예수라는 죄인이 눈을 뜨게 해줬다고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자 당시 종교적 권력을 가진 바리새인들에게 얼마 전만 해도 거지였고 보지도 못했고 죄인 취급을 받던 청년이 당당하게 말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9:25) 청년의 주장은 단순합니다. “당신들이 왜 예수를 죄인이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구원한 것은 그 사람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죄인으로 취급했고, 나의 불행을 조롱했고, 내가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나와 나의 부모를 모욕하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나를 다른 시선으로 봤습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따뜻한 시선을 느꼈습니다. 그는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내 삶은 암흑이었는데, 그를 만났더니 내 삶에 빛이 임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4. 보이십니까?
바리새인들이 말문이 막힙니다. “니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며 호통을 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아주 당돌하고 당당합니다. 30-31절을 보시면 그는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을 조롱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0-31) 그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 예수님께 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사람은 누구이고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청년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정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보게 된 것이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가 그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의 삶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을 보던 사람들, 한 번도 맹인으로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정작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맹인의 죄 때문에 그에게 불행이 임했다고 정죄하고, 그의 고통과 눈물과 아픔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런 사람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이웃의 아픔과 눈물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마음과 구원의 계획을 보지 못했고, 그들 앞에 있는 메시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눈을 뜨고 있지만 정말 중요한 모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제 세상을 보고, 진리와 생명을 보고 있는 그 청년이 외칩니다.
“당신들은 이전에는 나의 아픔과 눈물을 보지 못했고, 이제는 구원의 주를 보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이전에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지 못했고, 이제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당신들, 이제 내가 보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까?”
율법주의와 종교적인 기득권에 마음을 빼앗긴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이웃의 눈물과 고통뿐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이웃의 눈물과 고통에 민감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고 느끼는 일에도 둔감합니다. 당연히 복음도, 하나님의 마음도, 진리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눈과 귀는 오직 그들 자신만을 향해 있었습니다.
흠....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어려운 고백을 하나 할까 합니다. 실은 설교의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그 소녀에 대한 글을 지난 월요일 썼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신문사에 보냈고, 갈릴리 마을과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저의 제 글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습니다.
“억울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들어줄 수 있는 낮은 마음과 설명할 수 있는 당당한 마음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에서 만난 슬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할 돌부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글 밑에 답글이 하나 달렸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만난 불행이 작은 돌부리에 불과하다고요? 다른 사람의 돌부리는 작게 보이겠지요. 하지만 그 돌부리에 걸려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는 태산보다 높은 벽입니다.”
하실 말씀이 더 많은 것 같았는데 그 정도에 그쳤습니다. 당신이 무슨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안다고 그것이 작으니 크니 말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았으면서 위로한다고, 상담한다고 아는 척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분은 곧 그 글을 지웠습니다. 그 글을 쓴 분이 누군지 알기 때문에.... 더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여전히 보지 못하는 것이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잠시 저 자신에 대해 절망했었습니다. 여전이 마음이 열리지 않은 것이 많고, 여전히 들리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더 낮은 곳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더 깊은 곳에서 주님의 귀로, 더 어두운 곳에서 주님의 시선으로 보고 느끼고 섬겨야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보이십니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들리십니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느끼십니까?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시선, 예수님의 눈물... 평생 맹인으로 살아온 청년의 눈물과 아픔... 그리고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에게 두신 삶의 가치와 목적....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느끼고 서로 전할 수 있는 귀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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