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 홈 >
  • 예배와 말씀 >
  • 주일 예배
주일 예배
예배, 그리고 사람들 na kim 2016-06-21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119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131615

[성경본문] 누가복음14:12-14절 개역한글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6. 6. 19.

* 본 문 : 누가복음 14장 12-14절 말씀

* 제 목 : 예배, 그리고 사람들

 

지난 주 크로스 선교회 이사회로 모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습니다. 이사회 모임을 마친 후 저녁에 그 지역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 목사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친구 목사님과 사모님은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두 분이 가진 자질과 열심에 비해서 교회가 잘 성장하지 않아서 안스러운 마음이지만 뵐 때마다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는 미국 침례교회당을 빌려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일 오전에 미국 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 사모님이 피아노 반주를 합니다. 찬양을 인도하기도 하고, 성가대를 도와서 지휘를 겸하기도 합니다. 교회당 렌트를 사모님의 수고로 대신하는 겁니다. 오후에는 목사님의 가정이 개척한 한국 교회를 섬깁니다.

 

  1년 전부터 미국 교회에 새 성도가 왔습니다. 60세 전후의 미국인 여성이었습니다. 아마도 노숙을 하는 듯 지저분하고 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미국 교회 성도들이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정이 많은 사모님은 그 여성을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 여성은 교회 올 때나 마치고 돌아갈 때 늘 사모님을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과 허그를 하고 나면 사모님에게서도 냄새가 심하게 났습니다. 오후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교제를 할 때까지 냄새는 계속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불평했습니다. 사모님은 개의치 않고 계속 그 여성을 안아줬습니다.

 

지난 봄, 그 여성은 많이 아팠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미국 교회가 조촐하게 천국 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모님과 목사님은 한국교회 성도들과 함께 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외롭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여성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 성도의 냄새와 모습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외롭고 소외받는 한 영혼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1. “폐결핵인 것 같습니다.”

 

그날, 목사님 부부와 헤어진 후 저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제가 경험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꽤 복잡해졌습니다. 지난 봄에 저 역시 한 성도의 천국 환송 예배를 드렸었습니다.

 

아마 제가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아실 겁니다. 그 성도는 목사 사모님이었습니다. 남편 되시는 목사님을 한 번도 뵌 일은 없지만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목회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2015년 1월 첫 주일부터 우리 교회를 출석하셨습니다. 꽤 주관이 뚜렷하신 편이어서 제게 이런 저런 목회적 조언도 하시고, 가끔 호통도 치셨습니다. 지난 겨울이 시작되면서 눈에 띄게 수척해지셨고, 깊은 기침을 많이 하셨습니다. 기억에 문제가 생겨서 자꾸 다른 곳으로 운전을 한다고 딸이 차를 가져갔습니다. 교회를 오고 가는 길을 모셔드리기로 했습니다.

 

  지난 1월 말 경이었습니다. 라이드를 해드리던 김 목사님이 제게 심각한 얼굴로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사모님이 폐결핵을 앓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약국에 모셔다 드렸는데 약사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많이 수척해지셨고 기침이 너무 깊어서 걱정하던 차에 그런 말을 들으니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멀리 사는 따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따님과는 전에도 가끔 사모님의 문제로 통화를 했었습니다. 사모님의 증상을 이야기하고 병원에 한번 모시고 갈 것을 권했습니다. 따님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 봄에 전문인에게 검진을 했고, 이상이 없는 것으로 진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증상이 있고, 약국에서 하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또 자녀들을 가진 교회의 젊은 가정들이 많이 걱정하니까 다시 한번 진로를 받으시고 병원으로부터 진료의 결과를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폐결핵은 옳길 수 있는 질병이니까.... 이해를 부탁했습니다.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다시 모시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사모님에게도 그렇게 전했습니다.

 

  2. “예배하고 싶어요.”

 

한 달 반 정도가 지나서 3월이 되었습니다. 따님에게서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저는 시애틀에 집회를 인도하느라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 사모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목사요...? 요새 와 태우러 안오노? 이번 주일에 데리러 올끼가? 나 예배드리러 가야되는데....”

 

  예...예...하고 대답은 드렸지만 가겠다는 약속을 못했습니다. 따님과 연락을 시도해봤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3월 초 시애틀에 있었습니다. 두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마음이 많이 바빴습니다. 필라로 돌아가면 찾아뵈야겠다... 핑계처럼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교회 집회를 마치고 쉬고 있을 때, 아마도 화요일 오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이응도 목사님이냐고... 자신은 정기채 사모님을 방문해서 돌보는 간호사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교회와 제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고 하면서... 그날 아침 방문을 열어보니 사모님이 식탁에 앉은 채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제일 먼저 알려드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가끔 그 사모님이 생각날 때마다 마음이 덜컥덜컥 무너집니다. 제가 참 잘못했습니다. 목사답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모님을 목회적으로 섬기는 일을 제게 맡기셨는데, 제가 그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 사모님의 인생에서 가장 하나님과 가까워야 하는 때, 가장 소중하게 보내야 하는 때, 가장 잘 준비해야 할 때를 제게 맡기셨는데, 그 마지막 한 달 반을 제가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친구 목사님 부부의 신실한 모습을 보니 제 모습이 더 부끄러웠습니다. 안아달라고, 같이 예배드리고 싶다고 팔을 벌리는 하나님의 사람을 제 기준으로.... 판단하고 외면하고 방치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하나님의 품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제게 허락된 시간에 잘 섬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늘 말씀하시던 것처럼, “이목사요... 그라모 안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좀 더 깊고 넓은 품을 가진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것 밖에 되지 못해서 부끄럽습니다.

 

  3. 두 가지 마음

 

제가 그 일을 기억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제 안에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좋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면, 그 첫 번째 마음은 그 사모님을 귀한 한 생명,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의지와 생각으로는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이고 제가 잘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모님의 여러 가지 모습이나 행동으로 판단하고 정죄한 것은 아닐까요?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어머니처럼 잘 모시려고 했는데, 좀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모님이 아닌 저 자신입니다. 제 안에서 그 사모님을 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좀 더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두려움입니다. 그 사모님을 최초 진단한 의사와 통화를 했습니다. 자기 소견에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대화 끝에 목사님도 자녀를 키우는데 조심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조금 퍼져서 성도들 중에서 걱정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두 가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말 전염이 되는가... 접촉을 해도 괜찮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사실을 먼저 알게 된 성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교회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할 것 같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하게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과 두려움을 핑계로 그 사모님에 대해 제가 감당해야할 책임과 교회가 해야 할 사랑을 한 달 반 동안 외면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외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수종병 환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수종병이란 신장염의 한 종류입니다. 혈액 순환과 해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병입니다. 주로 얼굴과 팔, 다리가 붓고 구토나 어지럼증도 있다고 합니다. 전염이 되는 병은 아니어서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십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다. 이 환자는 너희 중 한 사람이다. 이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전통과 어긋나기 때문인데... 또 고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그들의 편견과 전통에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편견을 깨뜨리시고 환자를 고치십니다.

 

  7절부터 11절에는 말씀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다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11절 말씀이 핵심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예수님은 바라새인의 두려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잃어버리는 것, 낮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는 자가 높아진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2절부터 자신을 청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입니다.

 

4. 예배할 수 있을까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함께 식탁에서 먹고 마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십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예배의 조건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자리가 좋은 예배가 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도 좋은 예배의 조건이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는 예배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계시고 말씀이 있고 함께 나누는 식탁이 있는데 말입니다.

 

예배는 실은 누구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같이 앉은 것만으로 예배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믿음이 하나님이 선물이듯이 예배 또한 하나님과의 사귐에 초대받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예배의 잔치에 초대하는 일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것 역시 얼마나 감사한 일 일일까요? 그런데 초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지도자가 베푼 식탁의 자리에서 천국 잔치, 예배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예배할 때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잔치에 초대할 때, 즉 예배로,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초대할 때 그 자격과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잔치에 초대하면서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 자신이 기준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초대했으니 그 사람도 나를 초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내 기준으로 보면 잔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기준에 맞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 14:13) 그들은 적어도 내 기준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나에게 어떤 보상도 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반박하지 않습니다. 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이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까요? 첫 번째는 자기 안에 이미 초대할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들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조롱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들의 기준에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발생할 결과가 두렵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계속 예수님께 접근했을까요? 그들에게 너무도 불편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가 너무 두렵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먹고 마시라고...? 기득권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그들 집단으로부터 받을 비난과 조롱이 두렵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민하던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득권을 지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이 수백 년간 발전시켜 온 자기 기준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들이 지켜온 전통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초대하고 함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안에 편견이 없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옳다하고,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 할 때 두려움과 편견 없이 하나님이 그 천국 잔치에 초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며 찬양하며 헌신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을 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내 두려움이 하나님의 기쁨을 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떤 삶의 조건을 가진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소외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들 모두의 낮은 마음과 삶이, 희생과 헌신이 함께 필요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게 허락하신 예배가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의 잔치가 될 수 있도록 서로를 품고 안고 높이고 세우는 초대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새로운 시작 na kim 2016.06.27 0 1250
다음글 "보이십니까?" na kim 2016.06.13 0 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