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인생 | na kim | 2017-03-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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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0eC_H7BcwI&feature=youtu.be
2017. 3. 19. * 본 문 : 신명기 34장 1-12절 말씀 * 제 목 : 성공하는 인생 한국의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이 몇 년 전에 페이스북에 재미있는 글을 올렸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자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사진/램프의 요정)가 만일 내 앞에 있다면.... 나는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지니에게 기도할까? 하나님께 기도할까?” 김목사님은 고민을 좀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목사인데... 신앙이 있는데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지 무슨 램프의 요정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지니는 램프를 비비기만 하면 연기와 함께 뿅~하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주 침묵하십니다. 나의 소원과 필요에 딱딱 맞춰주지 않습니다. 최근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영화로 만든 엔도 슈사쿠의 ‘침묵/Silence’(사진/침묵)에서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소원과 필요에 침묵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합니다.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램프를 조작합니다. 세상에는 바로 자신이 지니라고 말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돈이, 권력이, 사람이 지니를 대신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멀리 있는 것 같은데, 세상에 충만한 지니는 하나님 대신 내 기도를 들어주겠다고 유혹합니다. 둘째는 지니는 내 소원을 점검하거나 거절하지 않습니다. 지니의 존재의 이유와 의무는 내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소원을 세 가지로 잘 정리하면 되고,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은 다시 한번 세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합당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신앙의 고백과 삶의 방향과 기도가 일치해야 합니다. 또한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도 살펴야 합니다. 결국 참된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으로 내가 변화되고, 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모든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당 종교는 사람의 인격과 기도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소원을 빌고 성취하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아... 복잡합니다. 그냥 소원만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셋째 램프의 요정 지니는 소원을 들어주고 나면 다시 램프로 들어갑니다. 램프의 주인은 나 자신이며, 지니는 내 삶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 생각과 삶을 변화시키시고 삶을 인도하십니다. 부르면 나오고 일이 끝나면 사라지는 지니와는 달리 나와 늘 함께 하시고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자,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 램프가 놓여 있습니다.(사진/램프) 한번 지니를 만나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램프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겠습니까? 1. 모세의 죽음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까? 저는 ‘십계’라는 영화의 포스터 장면이 떠오릅니다.(사진/십계) 홍해 바다 앞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서 있는 모습.. 모세를 생각하면 늘 그 장면을 떠오릅니다. 영웅이지요. 정말 멋있는 장면 아닙니까? 저도 모세 같이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본문 신명기 34장을 통해서 우리는 모세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그는 가나안 땅을 밟았을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던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합니다. 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신 32:50-52) 결국 모세의 인생은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끝났습니다. 슬픕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의 무덤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해석하기를 만일 모세가 가나안 저편 광야에 그의 무덤을 두었다면, 혹은 모세의 시체를 들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면 아마도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신비화하고 무덤을 신격화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무덤을 숭배하고 건축하던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모세는 그래서... 그 죽음과 함께 광야에서 사라집니다. 무덤조차 만들 수 없었던 한 사람, 모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모세의 죽음을 통해서 던지고 고민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모세의 삶을 평가한다면.... 모세는 성공한 사람일가요? 애굽의 왕자로, 광야의 목자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각각 40년씩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목적했던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광야의 어느 곳에 몸을 묻습니다. 그의 삶은 성공인가요? 실패인가요? 2. 고지론(高地論) 요즘 기독 청년들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는 직업윤리가 있습니다. 바로 ‘고지론’(高地論)이라 불리는 이론입니다. 대표적인 한 설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에서 고지를 점령하면 최소 3배에서 5배의 전략적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지만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한 이유는 바로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먼저 선두 즉 고지에 올라서야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야망을 위하여 고지를 정복하려고 힘쓰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하여 각자의 고지를 정복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릴 적 가정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할머니는 저희 손주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옵시고...”라고 반복했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나 고지론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도 비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문제는 고지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지에 올라서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데 있습니다. 고지에 올라서야 하는 이유, 목적,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고지에 올라서는 것 자체가 기도의 제목이자 인생의 목적이 됩니다. 고지에 올라서면 성공한 사람이 되고, 간증의 주인공이 되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고지에 올라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던가요? 고지에 올라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애쓰던가요? 또 반대로 고지에 올라서지 않으면 모든 인생은 실패한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일까요? 3. 실패하지 않는 인생 고지론에 따르면 예수님은 실패한 분입니다. 제자들도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우리에게 실패하는 인생을 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말고 낮은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 자신이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3-4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그들에게 있는 삶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맞는 은사와 능력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은사를 따라 조직의 중심에서 일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은사를 따라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의 결정과 판단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지는 일을 담당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고지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높은 곳에서 멀리보고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고지에 오르는 사람의 삶의 목적과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고지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그가 애굽의 왕자로 세움 받은 이유는, 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유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고, 자신의 삶을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고지에 올라서있기는 했지만 그 이유와 목적을 몰랐던 모세를 광야로 보내셔서 40년간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다윗을 광야에서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실패하지 않도록 인도하십니다. 만일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고지에 오르는 것이라면 단 한명의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과 대다수의 실패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지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가 인생의 목적이 될 때... 우리가 먼저 그 나라와 그의 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잘 했다... 참 잘했다... 너는 성공하는 인생을 살았으니까 내가 더 아름다운 삶을 나와 함께 허락하겠다 말씀하실 것입니다. 4. 성공하는 인생을 위하여 신명기는 모세의 인생과 함께 이렇게 끝납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신 34:10-12) 여러분, 모세의 인생은 실패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모세가 죽자 그 이후에는 아무도 모세같은 선지자가 없다고 미리 예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했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이적과 기사와 권능과 위엄을 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모세와 같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했고, 애굽의 권좌에서 쫓겨났고,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광야에서 이름 없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출애굽을 주도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40년을 헤매고 또 헤매었는데... 결국 가나안을 밟지 못하고 광야의 먼지로 사라집니다. 그의 이름으로 무덤 하나 세울 수 없었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땅 한 평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인생에서 성취한 것은 어쩌면...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누린 영광 또한 없습니다. 성공과 성취의 관점에서, 영광과 인정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모세의 삶을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고지에 올라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가 광야의 먼지로 사라지기까지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거절과 실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실패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성공적인 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실패하지 않는 인생으로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그 열쇠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헌신했는가에 있습니다. 세상은 소원의 성취를 약속합니다. 성공을 기약합니다. 성취와 만족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지니는 램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충만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처절하게 실패하는 인생으로 끌고 갑니다. 오늘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을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성공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으로,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고지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소원의 성취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우리의 삶에 이뤄지는 거룩하고 복된 삶을 사는 초대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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