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 은혜 (1) | na kim | 2017-03-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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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6. * 본 문 : 요나 2장 1-10절 말씀 * 제 목 : 우상과 은혜 (1)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아실 겁니다. 원래 이 말은 ‘미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국적 이상 사회를 이룩하려는 꿈’을 뜻했습니다.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 경제적 번영과 안정, 압제가 없는 자유로운 정치 체제의 영속... 등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이민의 역사 속에서 발전합니다. 비교적 이민이 자유로웠던 미국으로 건너 간 외국인들이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잘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 또한 아메리칸 드림에 해당합니다. 우리 이민자들의 공통된 소망이기도 합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앤드류 델방코’(Andrew Delvanco/사진1)는 ‘The Real American Dream'이라는 책을 쓰고 부제를 ‘A Meditation on Hope’(진정한 아메리칸 드림 - 희망을 향한 묵상)라고 붙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길지 않은 미국의 역사를 분석하고 각 시대를 이끌어왔던 시대정신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는 미국의 현대문명을 ‘신(神), 국가, 자아’라는 3단계로 구별했습니다. 미국의 초기 역사는 ‘신(神)’이 희망이 되었던 시대입니다. 신분과 계급, 부와 가난의 구별이 없는 세상을 원했던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처음부터 국가 건설을 목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모두에게 공통된 기회가 주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원했습니다. 영화 'Far and Away'를 보면 1800년 대 말, 아일랜드의 소작농의 아들이었던 조셉과 지주의 딸인 쉐넌은 각각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땅을 밟습니다. 그들은 영국에서는 엄청난 신분의 차이를 느껴야 했지만 미국에서는 서로를 도우며 사랑합니다. 원하는 땅을 얻고 가정을 얻고 꿈을 이룹니다. 초기 미국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해석하기를 원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신 것처럼 그들에게 자유의 땅을 허락하신 것으로 본 것입니다. 앤드류 델방코 교수는 이 시대를 ‘신에게서 희망을 찾았던 시대’로 정의했습니다. 미국 문명의 제 2단계는 ‘계몽운동의 시대’입니다. 미국은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보다 민주적이고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됩니다. ‘만인이 평등한 민주적인 국가 건설’이 가능한 것인가? 미국 사회는 스스로를 교육하고 계몽하면서 이 꿈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20세기에 일어났던 두 번의 세계 전쟁은 미국을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만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미국은 ‘신성함’이라는 개념을 국가에 대한 태도에 적용합니다. 국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신성한 제도이며, 국가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 또한 신성한 의무라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이러한 생각을 따라 미국에 참전했던 세계 각국에서 희생당했습니다. 베트남에서의 패배는 미국 문명의 흐름을 바꿔놓았습니다. ‘미국이 제일’이라는 의식도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이게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1970년 대 이후 미국은 개인의 자아성취와 보다 확대된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상적 체제 건설에 대한 희망이 개인의 자아성취로 대체됩니다. 체제간의 경쟁이 끝났고, 국가가 개인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희망도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앤드류 델방코 교수는 오늘날 미국 사람들은 자아의 성취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국가가 주던 도덕적 의무감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개인의 행복과 성취가 아메리칸 드림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1. 시대정신과 우상 미국의 역사를 시대정신의 흐름으로 해석한 앤드류 델방코 교수의 견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도 비슷합니다. 오늘날 한국은 국가 중심적 사고를 하는 60대 이상의 문화와 개인의 자유와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40대 이하의 문화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인권을 원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국가의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은 태극기를 듭니다. 세대 간의 인식의 차이가 뚜렷합니다. 물론 그 세대에 속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문제를 삼고 싶은 것은, 그것이 얼마나 옳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가 그 시대의 사조를 넘어서는 복음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직 초대교회가 유대주의적 사고를 넘어서지 못했을 때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 방문합니다. 베드로의 방문을 반대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그 장소를 급습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구원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있고, 혹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들이 받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를 피하고 맙니다.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바울이 책망합니다. 바울의 책망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왜 이방인들을 차별했는지 책망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념과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갈 2:14)라고 말합니다. 그 시대에 통용되던 가치와 정신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이 베드로였다면, 복음으로 그 시대를 넘은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인류의 역사를 따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는 참으로 많은 오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범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혹시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을까요?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했던 미국은 노예의 노동력으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화란의 개혁교회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을 오랫동안 정당화했습니다. 중세 십자가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십자군은 가장 부도덕하고 부정직하고 소모적인 전쟁을 했습니다. 나치 독일에 유대인 학살과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독일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과 선한 양심으로 그 시대가 가진 가치관이나 상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여로보암 2세의 시대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는 정말 흥미진진한 성경입니다. 문제는 이 성경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수산업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요나를 향한 부르심과 거절, 큰 물고기의 이미지가 요나서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요나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남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역사에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가 왕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크고 부강한 나라였고, 우상숭배가 가장 극심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요나와 함께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로는 호세아와 아모스가 있습니다. 그는 열왕기하 14:25에 여로보암2세에 대한 기록과 함께 등장하기도 합니다. 같은 시대에 선지자로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이 세 선지자에 대해서 잠시 고민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아모스 하면 무슨 단어가 생각나십니까? 정의와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그들의 악행의 결과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 열매입니다. 아모스의 요절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입니다. 호세아 하면 무슨 단어가 생각나십니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은 음란한 고멜과 같이 타락했습니다. 호세아가 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호 14:1) 두 선지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회복의 전제는 무엇입니까? 철저한 회개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2세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우상을 섬기면서 좀 더 큰 나라를 만들기 위해 권력을 사용합니다. 이 때 요나는 무엇을 했을까요? 요나의 이스라엘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요나를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요나의 생각과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선민의식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생각은 요나에게 있어서 복음일까요? 우상일까요? 3. 요나의 선택 요나의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요나는 꽤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왕궁을 드나들며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왕궁이 아닌 이방의 땅, 그 시대 북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가장 강한 나라였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선지자인데 말입니다. 그는 왜 순종의 니느웨가 아닌 거절의 다시스를 선택했을까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실패를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우상의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책망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그는 성공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니느웨가 회개하면 어떻하지...?’ 아... 복잡합니다. 실패도 성공도 싫습니다. 그냥 나는 북이스라엘에 남아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택하셨다는 사실만 반복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또한 그는 복음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에 다른 생각을 섞었습니다. 과연 니느웨의 회개가 이스라엘에게 유익할까...? 앗수르가 회개하고 회복되고 부흥하기보다 그냥 콱 망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하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밉고 분하고 억울해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좋겠다고, 회개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복음에 내 생각과 판단을 섞으면.... 우리는 요나가 됩니다.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감정과 생각으로 해석하고 섞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런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설교는 그렇게 들었지만....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유익을 고수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나의 선택은 도덕적인 독선에 근거합니다. 그는 악한 이방인인 니느웨보다 이스라엘과 자신이 더 가치있고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은 한편으로는 복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이었습니다. 복으로서의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인정이었지만, 독으로서의 선민의식은 그 자체가 우상이 됩니다. 요나가 그랬고, 예수님의 시대에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초대교회에 대해 유대사회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을 포기하지 못했고, 복음을 거절합니다. 4. 우상, 그리고 은혜 요나의 불순종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합니다. 요나의 우상을 하나님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는 선민의식이라는 자신의 우상을 품고 건넜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고, 그가 멸시했던 모든 이방인들에게 수치를 당했고, 니느웨가 아닌 자신이 심판을 대상이 되어 바다에 빠졌습니다. 물고기의 뱃속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의 기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8절을 봅시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욘 2:8)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세상이 그렇습니다. 니느웨가 그렇습니다. 또 누가 그러합니까? 바로 자신입니다. 내게 베푸신 은혜를 잊었습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의 원어는 'Hesed'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를 말합니다. 나의 마음에 찾아온 거짓되고 헛된 것, 즉 우상을 따르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를 잊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고 있다는 겁니다. 우상이 그의 마음과 삶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성공에 집착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에 매달립니다.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나의 정의가 앞섭니다. 불순종하고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판단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독점합니다. 그 사랑과 은혜는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 결과 그는 지금 깊은 불순종의 바다 속 물고기의 뱃속에 있습니다. 그가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9) 그가 붙들고 있는 모든 우상이 무너지고 비로소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명하셔서 그를 육지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지금부터 2800년 전 요나가 살던 시대보다 더 많은 우상이 우글거립니다. 우리는 우상의 시대를 삽니다. 우리 시대의 우상을 넘어서 복음의 인도함을 받는 초대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대의 상식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Hesed, 그 사랑과 은혜가 인도하는 삶을 사는 초대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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