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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은혜 (2) na kim 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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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2.

 

* 본 문 : 마태복음 1238-41절 말씀

* 제 목 : 우상과 은혜(2)

 

지난 금요일이었나요... 가까운 은행에 들렀다가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차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창문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얼룩진 그림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문득 창문을 내려 봤습니다. 비에 맑게 씻긴 세상이 참 예뻐 보였습니다. 철길이 보이는 풍경이었는데... 마침 기차가 한 대 지나갔습니다. ... 기차를 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다가 기차를 타면 고향으로 가면 좋겠다... 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감상에 젖어서 시 한편 썼습니다.

 

창을 내리면

선명하게 보이는 마을처럼

눈 감았다 뜨면

빨간 철제 대문이 보이면 좋겠네

세상 모든 언어로 지저귀는 아이들

골목마다 통통통 뛰어놀면 좋겠네

 

아무 역에서 기차를 타면

고향으로 가면 좋겠네

목이 컥컥 맥히는 계란

커어억~ 트림하는 사이다

쫄깃한 오징어, 달콤한 양갱

한 번 본 적 없어도 반갑기만 한

홍익회 아줌마를 만나면 좋겠네

 

차창 두드리는 빗소리

고향집 아궁이 장작 타는 소리

문득

창을 내리면

비바람 젖은 낯선 거리

후두둑 가슴에 내려앉는 소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저처럼 무딘 사람에게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고국을 떠난 지 30-40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고국의 드라마를 보고 노래를 듣고 뉴스에 관심을 가집니다. 비행기 배꼽만 봐도 고향 생각에 눈시울이 젖고, 유행가를 들으면서 한참을 눈을 감고 있게 되고, 한국에 있을 때는 부르지도 않았던 애국가를 부르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지난 주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요나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 요나의 선민의식이 이해될 것도 같았습니다. 본능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으로 조국 이스라엘이 부강해지기를 소원했던 요나가 국경을 맞대고 충돌하고 있는 제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1. 드디어 니느웨!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온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임합니다. 요나는 이번에는 순종합니다. 그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신앙생활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여전히 요나의 판단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유다가 멸망할 시기에 유다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하박국 선지의 생각도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하박국은 항의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답을 주셨고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기도란...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맞춰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때로 신앙은, 혹은 순종은 동의할 수 없고 내 판단에 반대되고 내 본능과 충돌하며 손해가 예상되고 네게 불편하고 어색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갔다가 두 번째 명령을 받고 니느웨로 간 요나는 딱 하루 동안 이렇게 선포합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3:4) 얼마나 하기 싫었으면 딱 하루만... 그것도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멸망할 것이라는 선언만 했을까요?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순종도 그런 것입니다. 내 생각과 같고 쉽게 동의되고 그렇게 하면 즐겁고 좋은 일이면 왜 그것이 십자자이고 희생이며 헌신이겠습니까? 나의 본능, 이익, 판단, 성품과 충돌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에 우리의 믿음이 역사합니다.

 

또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생각을 조작하지 않으십니다. 요나의 선민의식은 어느새 본능이 되고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그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룟 유다의 판단을 막지 않으셨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계산에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탐욕을 막지 않으셨고, 빌립보 교회에서 다투던 유오디아와 순두개의 각각 다른 두 마음을 같은 생각을 품도록 조작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보이시고 순종하라 말씀하시고 꼭 필요한 만큼 개입하십니다.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조작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순종하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의지로 결단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2. 복음의 능력

 

요나의 제한적인 순종의 결과는 놀랍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이방에 보내신 목적이 드러납니다. 복음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허락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혈통에 갇혀 있는 요나의 믿음을 이방의 땅에 심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아무리 그가 딱 하루만을 그것도 저주의 선포를 했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의 복음은 요나를 통해 역사하셨고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요나의 판단과 분노가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역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두 질문이 있습니다. 먼저 요나는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 도구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고, 또 거절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나빠 보이고 모자라 보이는데 하나님은 요나의 최소한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최대한을 이끌어 내십니다. 둘째 니느웨는 복음에 합당한 족속인가요? 아닙니다. 모자라고 악한 선지자 요나가 생각해도 이런 백성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면 변화됩니다. 역시 최소한의 복음이 들어갔는데 최대한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락하신 은혜의 복음이 우리를 통해서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에 부끄러워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스로만 가지 않으면 됩니다. 니느웨로 가서 나의 최소한만이라도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또한 저런 사람이 복음을 받을까... 복음을 전할 가치가 있을까... 과연 변화될까... 걱정하지도 판단하지도 맙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나는 허락된 은혜와 사명을 감당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같은 사람을 통해서 니느웨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같은 사람들도 이렇게 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3. 왜 요나서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 고민하고 대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요나는 순종을 한 것일까요? 충분히 생각하고 대답을 한번 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께, 우리 자신에게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순종하고 있습니까? 교회 출석하고 예배드리고 헌금하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 속에 내 마음과 소원대로 사니까 순종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요나에게서 두 가지를 함께 발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선민의식이라는 우상을 둘 다 포기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잠시 내려놓고 선민의식이라는 우상을 품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물고기의 뱃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갑니다. 받은 은혜를 증거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도.... 함께 들고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최소한의 순종을 한 후에 그는 니느웨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 성이 망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혜는 어디 있고 우상은 어디 있습니까? 둘 다 요나 안에 있습니다. 정작 이방의 성 니느웨는 지금 회개와 부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은혜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끝까지 자기 안에 있는 우상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내가 화를 내다가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왜 요나서가 성경일까요? 요나서의 결론이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거나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졌거나... 그런 결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요나서를 성경으로 남기셨을까요? 그것은 먼저 요나의 모습이 정확하게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고 믿고 품고 사는 우리에게 포기하지 못하는 우상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주인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두 가지를 함께 섬긴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성도와 교회는 요나와 같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경계에서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깝기보다 세상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두 가지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4. 요나의 표적

 

그리고 요나서가 중요한 성경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경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그들은 갈등합니다. ...어떻게 하지...?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공부하면서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났더니 새로운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 그들은 갈등합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우리들에게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보여주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요나는 자기 안에 있던 두 주인으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두 주인 때문에 다시스로 가기도 했고, 반쪽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표적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두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요나의 표적은 부활에 있습니다. 요나가 복음을 거절했을 때, 우상을 섬길 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은혜를 붙들었을 때 하나님은 3일 만에 그를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면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들 또한 믿음 안에서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상이 아닌 구원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요나를 통해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2000,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나를 통해서 그들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또한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두 주인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우상을 각각 손에 붙들고 놓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 때...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삶에 풍성히 넘칠 것입니다. 생명 풍성한 삶으로 영광돌리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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