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 은혜(3) - 시간을 주시는 이유 | na kim | 2017-04-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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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9. * 본 문 : 시편 130편 * 제 목 : 우상과 은혜(3) - 시간을 주시는 이유 선지자 요나에 대해서 세 번째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요나에 대해 성경 이야기로 풀어 쓴 글이 여러 개 있어서 한번 살펴봤습니다. 그 중에서 독특한 제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인 ‘시간을 주시는 이유’라는 글이었습니다. 오...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 아닙니까? 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에게 니느웨에 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바다에 갑자기 큰 풍랑이 임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살기위해 발버둥칩니다. 요나는 배 밑바닥에 잠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깨웁니다. 비로소 요나가 문제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지자이며, 이 풍랑이 자신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그런데, 아무런 대안이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왔기 때문에 기도할 수도 없고, 자신을 어떻게 구해볼 수도, 사람들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선택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부탁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욘 1:12)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제는 끝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구나...라고 생각하면, 세상으로부터도 하나님으로부터도 어떤 동정이나 구원을 받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면.... 어떤 마음일까요? 요나는 자신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다에 던질 때 발버둥치거나 저항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최소한의 ‘자기방어’와 ‘자기의’(自己義)조차도 표현하지 못하는 비참한 결말입니다. 검고 깊은 바다에 빠져 들어갑니다. 1. 요나에게 허락된 시간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절망까지가 요나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준비하시는 일입니다. 요나는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시간을 주십니다. 벽을 만난 줄 알았더니 문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산을 만났는데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 3일간의 시간 - 삶의 어느 순간보다 압축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어느 순간보다 의미 있고 중요한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과 잘 대화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선물하신 물고기 뱃속에서의 3일 - 요나는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아무도 개입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 시간동안 요나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자신을 만나야 합니다. 참 교만했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소원을 혼동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자신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만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우상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거짓과 교만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는 절망의 검은 바다, 그 바다를 헤엄치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비로소 자신을 정직하게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얻습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헛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합니다.”(욘 2:8) 또한 그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나의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요나가 풍랑을 만나기 전, 그의 불순종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기 전, 자신에게 있는 모든 허위와 거짓이 부정되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이 깊은 절망에 대해 그 어떤 변명도 방어도 손톱만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요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을 제한하고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유입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입니다. 나의 이익과 생각에 충성해야 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선지자로서의 나의 사명은 내 뜻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순종과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그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납니다. 고백합니다. “나의 소망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욘 2:9)
2. 은혜를 경험한 후에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상하는 성경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도 좋습니다. 문제는 요나서의 후반전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요나서의 전반전, 요나가 자기 생각과 의지로 살았던 시기입니다. 그에게 half time이 주어졌습니다. 그 시간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 깊은 곳, 물고기의 뱃속에서 만나주셨습니다. 그 3일은 요나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3일입니다. 이제 그 3일이 말하고 결심하고 인도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경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과정은 다양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시기도 하고, 바울처럼 예수님의 그림자를 적대적으로 추적하다가 은혜를 만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야곱의 예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욕심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최초의 실패는 그의 가장 큰 성공 뒤에 따라옵니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 거부가 되었고, 큰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큰 걱정거리였던 형님과도 화해했습니다. 세겜이라는 가름진 땅에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그동안 쌓였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와서 만나주십니다. 야곱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자신의 의지로 처음 하나님께 서약했던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벧엘은 야곱의 half time이며, 하나님과 그의 언약이 회복되는 장소이며 시간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욕심과 소원대로 살았다면 이제는 은혜와 약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곱은 그 일에 실패합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는 약속와 은혜의 땅 벧엘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위기가 사라지니까 다시 이전의 야곱으로 돌아갑니다. 요나의 전반전은 비록 선지자였지만 자신의 의지와 소원대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후반전은 어떻습니까? 그는 고민하고 기도하며 자신의 후반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전반전을 주장했던 자기 소원과 의지로 살 것인가? 후반전을 시작하기 전 3일간의 하나님의 시간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소원과 은혜가 인도하는 삶을 살 것인가? 은혜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생각들을 경험한 후에... 과연 요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면서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3. ‘개와 늑대의 시간’ 요나는 그 시대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왕궁을 드나들며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은혜를 경험한 후에 보여주는 삶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서 3-4장은 그의 인생의 후반전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서 복음을 전한 후 니느웨의 회개를 보면서 당황합니다. 분노합니다. 그리고 성 동편 언덕에 올라갑니다. 아예 초막을 짓고 그 성이 망하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과 논쟁합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구원했던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우상입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습니까? 자기의와 분노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까? 요나는 자신에게 임했던 은혜가 아닌 자기 안에 있는 분노가 니느웨에 임하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짧은 영상을 한편 보시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Mvy3LvPnJ0 (0:12~0:44) ‘개와 늑대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 -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프랑스 말이면서 2007년 한국 MBC의 드라마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 의미는 영상에서 보신 대로 '해 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개와 늑대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때로 세상의 문화와 지식과 성공과 가치가 나를 돕는 개인지, 나를 해치는 늑대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나의 소원, 나의 가치관, 나의 판단이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해치고 물어뜯는 늑대인지, 나를 도와서 양떼를 지키고 어두운 밤에 나를 보호할 개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황혼의 때,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나의 마음과 영혼을 무엇인가가 가리고 있을 때입니다. 요나가, 요셉이, 아브라함이, 야곱이, 사울왕이, 다윗왕이, 솔로몬 왕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로 살 때에는 선명하고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성공이, 평안함이, 세상을 향한 그들의 소원이 그들의 마음과 눈을 가립니다. 희미해집니다.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의 뱃속에서 만났던 정직한 자아가 니느웨 성에서의 성공 이후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울왕과 솔로몬은 낮은 곳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그들이 왕의 권세를 누리게 되었을 때 그들은 늑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를 해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정직한 자아를 만났던 그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스스로 늑대가 되었습니다. 깊은 바다, 물고기의 뱃속에서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의 자아를 회복했던 요나는 다시 한 마리 거친 늑대가 되어 니느웨 성 동편 언덕에서 우~~ 하나님을 향해 이빨을 드러냅니다.
4. 십자가에 오르다. 시편 120-134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따라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 열 다섯 편의 시들은 각각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 130편은 ‘가장 깊은 곳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나이다”(시 130:1) 시인은 가장 낮은 곳,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바로 해발 790미터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왜 시인은, 그리고 순례자들은 하나님의 성으로 올라가서 제단 앞에 엎드리기를 원했을까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실존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제물로 드려지는 짐승의 죽음을 보면서 그것이 나의 죽음임을 고백합니다. 나의 허물과 죄는 저 짐승처럼 죽어야 마땅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소망합니다.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고 내 안에 울부짖는 늑대를 물리치고 목자를 도와서 함께 양을 칠 목견을 발견해야 합니다. 언덕에 올라 울부짖는 늑대가 아닌 가장 겸손하고 순전한 종으로 발견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고향 땅에서부터 유대 광야를 지나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걷고 또 걸으며 노래하는 심정으로 시 130편을 함께 읽어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번 한 주간을 고난의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성도와 교회에게 이 시간을 허락하셨을까요? 이 시간은 요나에게 허락한 3일과 같은 시간입니다. 야곱에게 허락한 벧엘과 같은 시간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솔로몬에게 주어진 시간과 같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길을 떠난 이스라엘의 순례자들의 시간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시간을 허락하시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가치있고 의미있는 시간이 되는가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한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허위와 거짓과 우상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세상의 가치에 젖어서 구별하지 못했던 늑대를 찾고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하는 한 주간, 요나의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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