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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13.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롬 7:19-25) na kim 20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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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3. 13.

* 본 문 : 로마서 7장 19-25절 말씀

* 제 목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즘 제가 새벽기도에 나올 때 즐겨 입는 옷이 있습니다. 등산복 비슷한 것인데요, 따뜻하고 멋있습니다. 방수되는 나는 스포츠용 외투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옷을 사고 싶어서 백화점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꽤 비싸더군요. 마음을 접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입고 다니게 됐습니다.

2주 쯤 전이었나 봅니다. 차에 문제가 있어서 혼다 딜러에 갔습니다. 한두 시간 기다려야 했습니다. 뭘 할까 하다가 잠시 산책을 나왔습니다. 바로 앞에 구세군에서 하는 Thrift Shop이 있더군요. 구경이나 하려는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눈에 확 들어오는 옷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25년 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유행하던 골덴으로 된 양복 상의였습니다. 청바지에 입어도 되고, 넥타이를 안매도 되는 참 편하고 세련되게 보였습니다. 나도 그런 옷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정말 그런 양복 상의 하나가 떡~ 하니 있지 뭡니까? 그것도 은색과 흰색을 섞어 놓은 듯한, 좀... 멋있어 보였습니다. 입어 봤습니다. 흐음.... 괜찮았습니다. 저는 입고 있던 옷을 팔에 끼고 그 옷을 입고서 다른 것들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 바스락거렸습니다. 보니까 옷을 기증하신 분이 제대로 호주머니를 비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쪽 호주머니에서 껌종이도 나오고, 휴지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편의점 WAWA의 선불 카드가 나왔습니다. 다른 것들을 휴지통에 버리고, 그 카드도 버릴까 하다가 바지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구경을 조금 더 했습니다. 그리고 계산을 할 때쯤 다시 생각해보니 옷이 예쁘기는 한데 약간 유행에 뒤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앞 단추가 두 개 달린 대다가 제 몸에 너무 딱 붙는 느낌이기도 하고... 결정을 내리기가 주저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에이... 오늘은 그냥 가고...’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몇 일이 지났습니다. 빨래할 옷을 내 놓으려고 챙기다보니 호주머니에 뭔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WAWA 카드였습니다. 교회로 오는 길에 WAWA에 들렀습니다. 커피와 도넛을 사고 그 카드를 확인했습니다. 그것들을 계산하고 $2.77 의 돈이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결국 약 5불 정도의 잔액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그 카드를 발견할 때와 그 옷을 두고 가게를 나올 때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거든요. 다만 중요하게, 그리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또 옷을 살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가... 옷만 그냥 두고 나온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 것이고, 좀더 엄밀히 말하면 훔친 것이지요. ‘아... 이거 우짜지....?’ 고민이 됐습니다. 다음날 다시 그 Thrift Shop으로 갔습니다. 일단 그 옷부터 찾았습니다. 벌써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이거 참...우짜지... 이걸 우짜까...?’ “있잖아요, 내가 옷을 사려고 했는데... 에... 그냥 카드만 가져갔는데... 에... 보니까 5불이 남아 있는데... 아... 그래서 다시 왔는데.... 아... 미안하고.... 어쩌고....” 이렇게 설명하려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오자니 도둑질한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고, ‘우짜지...우짜지...’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고는 다른 옷을 듬뿍 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골덴 양복에 붙어 있던 가격의 세 배 정도 되는 돈을 써서 옷과 장난감을 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요즘 제가 입고 다니는 옷입니다.

사실 저는 가끔씩 저 자신이 한심할 때가 있습니다. 저 자신에게 “야, 이응도! 너 도대체 왜 그래...?” 하며 짜증이 납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너무 못났고, 부끄러운 일,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과 행동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대단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이익이나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엉뚱하게 반응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참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장면들 속에 저 자신이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후회하고 자책합니다. 고백컨대 그런 일은 저의 평생 때때로 반복되는 일입니다.

1. 미녀와 야수? 혹은 지킬과 하이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문득 자신에 대해 놀라는 적, 자신이 해 놓은 일과 말과 행동을 보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내 안에 이런 면이 있었나...”.하면서 후회하신 적은 없습니까?

요즘 상담학에서 가장 많이 이슈가 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다중인격, 즉 한 사람 안에 전혀 다른 두 가지 인격이 함께 드러나는 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미국의 법정에서는 다중인격을 정신적 심리적 장애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범죄는 무죄로 판결이 납니다. 병적 상태에서 범죄 행위를 한 것은 정신 치료의 대상이지 징벌의 대상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호사들은 이런 증상을 이용하여 피고인을 무죄로 만들기도 합니다. 영화 'Primal Fear'에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카고의 한 카톨릭 주교가 처참하게 피살됩니다. 그리고 범인으로 애런이라는 19세의 소년이 검거됩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애런이 범인임이 분명합니다. 사건의 변호를 자청해서 맡은 변호사 배일은 애런을 만나는 중에 그에게서 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애런 안에 로이라는 또 다른 인격이 있어서 로이로서 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배일은 애런에게 심각한 정신 장애가 있음을 증명해보이고 애런은 무죄 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애런의 그 모든 증상이 철저하게 조작된 거짓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사실 우리 안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또 다른 모습이 있음에 대해 고민한 것은 그 영화만이 아닙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미녀와 야수’ 또한 멋있는 왕자로서의 자신의 원래의 모습과 야수로서의 자신의 현재의 모습 속에 고통당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심각한 고민을 교회 앞에 고백합니다. 자기 안에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원하지 않는 악한 본성이 있고 스스로 그것을 이길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스스로를 표현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의 영어적 표현은 "What a wretched man I am!”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불쌍하고 비열한 사람이 있다니.... 그게 바로 나라니!”라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떤 선택과 행동이 바울 자신에 대해 그렇게 실망하도록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19절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했고”(롬 7:19), 그 이유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기 때문”(롬 7:23)입니다. 자신이 동의하고 사랑하고 따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성품과 욕심이 이기는 삶 - 바울은 이것에 대해 절망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2. 처절한 악함 혹은 연약함

다시 한번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처절하게 실망하신 일은 없습니까? 바울은, 그리고 성경은 곳곳에서 “사람은 원래 그렇다. 그렇게 악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인류 최초의 음악, 혹은 노래는 ‘라멕의 노래’입니다. 가인이 후손이었던 라멕은 창세기 4장 23-24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였고, 자신이 해를 입은 다는 이유로 소년을 죽였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조상 가인보다 더 만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노래를 통해서 그저 악을 행하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즐기고, 나아가 악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일을 맡았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예, 사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조차 그들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서를 따라 형을 집행합니다. 산헤드린 법정에서 최종 심문을 하고, 형틀인 십자가를 죄수 스스로 지고 올라가게 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못을 박고, 허리에 창을 찔러서 죽음을 확인하고... 그런 과정은 그들이 아닌 그 누구라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탄력’을 받기 시작합니다. 점점 잔인해집니다. 예수가 쓰러질 때까지 채찍으로 때립니다.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욕을 하며 조롱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 섞인 명패를 달고, 아주 강한 가시로 만든 관을 씌웁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33세의 한 청년이 자신의 신념을 따라 십자가 위에서 천천히 죽어갈 때,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을 넘어서서 조롱하고 침 뱉고 모욕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의 고통과 눈물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이 우리들 속에도 이런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저 잠시 부주의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잔인해지고 더 악해지고 더 굳은 마음으로 정죄하는 일은 없을까요? 사실 이민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과 정죄인데요, 우리는 내가 판단할 때 저 사람이 잘못했다 결정하면 다른 사람과 더불어 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음껏 정죄해 버립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쩌면 이미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웃고 조롱합니다. 소외시키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통해서 처절할 만큼 악한 우리들의 모습, 불쌍하리만큼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3. 두 가지 해야 할 일

말씀 드린 대로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잇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당시 구스인은 흑인들이었습니다. 흑인의 피부가 희게 된다면, 표범의 얼룩 무늬가 빠진다면 인간이 죄 아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생각과 같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시편 51:5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예레미야 선지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에베소서에서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기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라고 했습니다. 어지러우시죠? 이것이 우리들, 사람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해석이자 인식입니다.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마음 깊은 곳까지 악하고 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을 행하고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 가능성은 애초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악을 행하고 비겁하게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악하게, 때로는 부주의하게, 때로는 의도적으로 죄를 즐기며 살아갈까요? 여전히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게 천국에도 가고 지상에서도 즐거움을 누리려고 애쓰며 살아갈까요? 여전히 두 마음과 두 삷을 가지고 살아갈까요?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할 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인정하며 무엇을 간구할까요?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1-3) 다윗은 지금 무엇을 인정하며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다윗이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악함입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라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 악함과 연약함을 극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저는 다윗의 기도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요즘 저의 기도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간구합니다.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성도 여러분! 살다가 문득문득 자기 안에 있는 악한 모습,, 죄에 대해 연약한 모습을 발견하십니까? 아직도 그 죄악된 본성이 내 안에 남아 있음을 느끼십니까? 내려놓고 고백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4. 단 하나의 희망

저는 당분간 말씀 드린 그 옷을 입고 다닐 것 같습니다. 옷을 볼 때마다, 입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 교회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받아서 그 일을 통해 여러분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 빼고는 여러분과 다를 것도, 나을 것도 없는 연약하고 악한 사람입니다. 나 자신에게서 어떤 희망도,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 단지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도우심만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제게 있어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희망이 예예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에 대해 한 없이 절망했던 사도 바울 또한 바로 이것에서 유일한 희망을 발견합니다.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탄식했던 바울은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요, 절망적인 사람이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죄인으로 알고 나의 모든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면, 내가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면 우리 주님은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주시고 나를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시대는 내가 나를 연약하게 여지기 않아도, 내가 나에 대해 절망하지 않아도 세상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시대 같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망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바르게 해야겠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주여,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믿음과 이 소망으로 더욱 겸손히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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