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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9. 하나님의 비전을 품으라(삿 6:11-18) na kim 20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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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12.

* 본 문 : 사사기 6장 11-18절 말씀

* 제 목 :   하나님의 비전을 품으라.

4주째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고, 어떻게 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세상에 증거될 수 있을까요? 저는 지난 주 우리가 준비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성품이요, 둘째는 비전 혹은 소원, 셋째는 가치 혹은 가치관입니다. 지난 주에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고, 오늘은 우리들의 인생의 비전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지난 주에는 아주 재미있고도 인상적인 일이 세계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있었습니다. 7000명을 수용하는 드골 극장이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청년들과 청소년들로 가득 찼습니다. 들어오지 못한 수천명은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극장 안에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고, 극장 밖에는 공연 티킷을 구하지 못한 청중들이 공연을 연장해달라고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한국의 대표 기획사인 SM Town이 소속 아이돌 그룹인 소녀시대,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F(x), 샤이니와 함께 기획한 이번 공연은 큰 성공으로 끝났습니다. 한국의 가수들이 한국어로 노래를 하고 유럽의 젊은이들이 한국말로 노래를 따라하고 춤을 흉내 내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고, 그 어느 아시안 연예인들이 이루지 못한 큰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SM Town의 대표자인 이수만씨가 공연 전에 유럽 각지에서 온 음악가들, 공연 기획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것입니다. 21세기에 세계 대중 문화의 방향과 흐름에 대해서, 그리고 소위 K-Pop이 어떻게 세계 주류 대중 음악을 주도하게 되었는지를 강의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 대중 음악은 서양 대중 음악과 일본 J-Pop의 아류에 불과했습니다. 노래가 좀 뜨면 표절이니 왜색이니 각종 루머가 떠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음반 기획자들이 영재 육성 프로그램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서 어려서부터 훈련을 시키고 교육을 하면 시장성이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뽑힌 끼 많은 어린 아이들이 길게는 10년가까이 노래하고 춤추고 방송 연습을 하는 과정을 거쳐서 다듬어지고 드디어 대중 문화를 주도하는 상품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문화 평론가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세계 어디를 봐도 한국의 아이돌의 나이에 이렇게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 잘추고 방송 잘하는 연예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잘 준비되고 훈련된 문화 상품을 만들면 한국 가요도 세계 시장을 정복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던 몇 사람의 생각이 현실로 바뀌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 10년 전에 한국 아이들 그룹이 파리 드골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고 했으면 웃음 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수만 사장이 강의를 마칠 때 언젠가 SM Town이 화성에서 공연을 기획할텐데 당신들을 초대할테니 다 오라는 말을 했습니다. 유럽의 각국에서 온 음악가들, 대중 문화를 주도하는 전문가들이 다 일어나서 박수를 쳤습니다. 적어도 K-pop으로 9조에 상당한다는 유럽 음반 시작을 정복하겠다는 그의 꿈은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1. 세상 속에 섞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오늘 본문에는 한 농부가 등장합니다. 그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고, 그가 얼마나 역사의
식이 있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세상 속에 숨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뜻과 비전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살다가 이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가 곡물을 약탈하는 미디안 군대의 눈을 피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사기 6장 1절부터 보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땅에서 우상을 숭배함으로 고난을 당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런 악을 다시 행한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는 종족은 미디안이라는 부족이었습니다. 미디안과 이스라엘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미디안이 이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간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을 잃고 산에 구멍과 굴을 파고 숨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종할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군대를 몰고 와서 약탈하고 죽이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참 어리석지 않습니까?
노예였던 그들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의 소유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소유할 수 있는 땅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생산하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던 그들에게 자신의 땀의 소산을 스스로 취하여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요로 살아가던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그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말씀 드린 대로 그가 얼마나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의롭고 바른 신앙을 가졌는지 성경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드온 또한 ‘먹고 살아남기 위해’ 비겁하고 불쌍한 방법으로 자신을 지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거스를 수도 없고,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세상을 대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세상을 벗어날 수도 없이
그저 세상의 흐름 속에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살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기드온의 시대였고, 기드온의 삶이었습니다.


어쩌면 성도 여러분! 우리도 기도온과 같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자니 세상은 너무 거대하고, 세상을 거스르자니 뒤처지는 것 같고, 세상을 대적하자니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고, 세상을 즐기자니 성도의 양심에 걸리고..... 그저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함께 흐르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무엇이 하나님의 사람을 그토록 무기력하게,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을 살도록 만들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마다 부르짖던 외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기드온 또한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삿 6:13 下)


지난 주 저는 제가 자주 글을 쓰는 갈릴리 마을에 올라온 한 글 때문에 마음에 많이 아팠습니다. Sea of Glass라는 한 형제가 “이 노래를 떳떳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내용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지성전들을 섬기는 목회자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여러 개의 지성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조용기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고 소위 중앙 권력이 약해지자 좀 더 서울 중심가에 있는 지성전으로 옮기고 싶은 지성전 담임 목회자들의 권력 타툼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찬송가 495장을 진심으로,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목회자가 있는가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지만 사실 일부 목회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한국 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함께 반성해야 할 문제이면서 한국교회 전체의 신앙의 정도를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왜 찬송은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해 놓고는, 실제 삶에서는 더 좋은 곳 더 큰 교회, 더 편하고 영화스러운 것을 찾으려고 할까요? 후렴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고백이 우리들의 참된 신앙의 고백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의 이스라엘,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함께 경험하고 있는 영적 침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자유와 기업으로 주신 땅을 빼앗기고 산으로 들로 숨어 살 수 밖에 없었습니까? 왜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외면했다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났다고 원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와 은혜를 허락하신 한국 교회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조롱받고 손가락질 당합니까? 왜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처하신 낮은 자리가 아닌, 세상의 왕들이 취하고자 했던 높은 자리로 올려가려 합니까? 왜 한국 교회와 성도의 지향점은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는 성공과 번영에 초점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원망이 한편 옳은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러나 틀린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외면했고,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딜레마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이되 복음의 능력도 성령의 은혜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고자 하는 삶의 자리와 우리가 소원하는 삶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비전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큰 용사여,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십니다. 가장 먼저 선포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라고 했습니다. 정말 기드온이 큰 용사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디 큰 용사가 숨어서 포도주를 짜는 기계로 탈곡을 하고 있겠습니까? 세상과 적당하게 어울려서 원망하며 타협하며 살아가는 기드온, 만일 하나님이 그를 찾으시고 하나님의 생각과 비전을 그와 함께 나눠주지 않으신다면 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그를 ‘큰 용사’라 부릅니다. 왜 그가 큰 용사입니까? 어떻게 큰 용사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가 하나님이 이미 그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믿고 살아간다면, 믿고 하나님의 생각과 비전을 따라 그 삶을 헌신하기만 한다면 그는 먼지와 같이 사라질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용사로 이스라엘과 성경의 역사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 어디에나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높은 곳에 서지 않아도,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않아도, 메마른 광야나 거친 들에 서 있어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큰 업적을 남겨서 큰 용사가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함께 하시겠다는 믿음을 주심으로 그를 큰 용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살고, 초막에 살아도, 날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며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삶을 살아도 내 주 예수가 나와 함께 하시고, 내 마음을 주장하시면 나는 하나님의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사가 되어 하나님이 품은 비전과 생각에 헌신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내 비전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심하는 기드온에게 다시 한번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치듯 하리라”(삿 6:16) 이 말씀은 이뤄졌을까요? 예,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세계 전쟁사에 있지 않았던, 단 300명의 용사가 135,000명의 군대와 싸워 이기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를 큰 용사를 삼으시고 마치 삼백명이 한 사람을 치는 것처럼 135,000명을 쳐서 이긴 것입니다.


4.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얼마 전까지, 아니 여전히 우리 교회는 건축에 매달려 있습니다. 재정의 많은 부분이 건축과 유지 비용에 소모되고 있습니다. 인력이 함께 소모됩니다. 교회당을 세우는 것이 우리의 비전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할까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어떤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교회를 통해서 증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최근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2009년에 정신없이 교회 건축을 향해 달려갈 때 하나님께서 두 성도의 가정에 큰 어려움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이 너무 가까이 다가온 듯한 생생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각 성도와 가정과 교통하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저와 우리 교회에도 큰 은혜와 계시를 주셨습니다. 뭐 대단히 특별하고 독특한 것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하고 아무리 교회당을 세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눈 앞에 선뜻 죽음이 다가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신앙이 아무런 능력도 은혜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간증거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면, 내가 기드온으로 살면서 미디안의 압제 하에 있어도, 내가 모세로 살면서 광야에 목자로 살아도, 내가 요셉으로 살면서 거듭되는 고난을 만나도, 내가 다윗으로 살면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내가 하나님의 품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는, 교회와 성도는 큰 용사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동역하는 용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문법을 잘 보십시오.
“큰 용사여,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격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망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격려입니까? “내가 너를 보냈고, 내가 너와 함께 하면 너는 큰 용사가 된다”는 측면에서는 격려입니다. 하지만, “내가 너를 큰 용사로 삼고 이 세상에 보내었는데, 너는 도대체 왜 이렇게 나약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느냐?”라는 말씀으로 받으면 이것은 책망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이 세상을 향한 큰 용사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용사의 비전을 소유한 하나님의 일군들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우리가 담대하게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나아가 미디안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승리의 깃발을 세우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아주 작다고 생각하는 일, 이 정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이나 성질로도 된다고 생각했던 일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장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기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면 안되는 일,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면 안되는 일을 찾아 보십시오. 내 뜻과 성품과 생각대로 했더니 늘 마음에 걸리고 해결되지 않았던 일을 찾아보십시오. 그 일에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용서를 적용해 보십시오. 가장 작다고 생각했던 일, 그러나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문제에 도전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큰 용사로 삼으시고 날마다 함께 하시며 날마다 여러분을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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