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6. 12.
* 본 문 : 벧후 1:1-11
* 제 목 :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라.
저는 3주째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까지 우리들 성도와 교회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고 보여질 수 있을까요? 저는 세 가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방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는 성품이요, 둘째는 가치 혹은 가치관이요, 셋째는 비전 혹은 소원에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성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이제 거의 40번 이상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있을 집회에도 이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상담학교와 주일 설교를 통해서 오래 전에 이미 각각 전한 바 있기 때문에 오늘은 여러분 모두가 이 말씀을 암기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를 잘 따라 오시면 여러분의 머리 속에 이 말씀이 쏙~ 들어가게 됩니다. 자, 한번 따라와 보시겠습니까?
1. 복음을 주신 목적(1:2-4)
먼저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3절을 봅시다. 무엇을 주셨습니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주셨기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3절 하반절에 보시면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2절을 보시지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면 그것은 곧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4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을 알고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약속은 무엇입니까? 믿는 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약속은 구원의 약속,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땅을 살되 하나님 나라의 구원 받은 백성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벧후 3:13에서 이 말씀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그리고 4절 하반절에서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큰 약속, 즉 복음을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이 땅 살아가는 동안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사는 성도가 성도와 교회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도록 하기 위해, 이 땅을 살지만 이 땅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2. 구비해야 할 신의 성품(1:5-7)
그렇다면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성품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하나로 단정지어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8가지 성품을 차례로 말하되 한 성품에 다음 성품을 ‘공급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를 들면 5절에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이라고 했을 때 7절 하반절에 “공급하라”는 말씀에 의해서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 덕에는 지식을 공급하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가장 먼저 ‘믿음’을 언급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통로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믿음’을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믿음에.....”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에 무엇을 공급하면 믿음이 온전해질까요? 덕입니다. 믿음에는 덕을 공급해야 합니다. 동의가 되십니까? 사실 우리가 쉽게 다른 성도를 비판하는 중에 “믿는 사람이 어떻게...” 혹은 “목사가 어떻게 그런...” “장로가 어떻게...”라는 말을 합니다. 믿음과 경륜으로 보아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쉽게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에 덕이 없는 것입니다. 덕이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말과 행동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부분에 연약합니다. 믿음은 있지만 덕이 없을 때 사람들은 우리들의 믿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덕 없는 말과 행동 속에서 세상을 봅니다. 믿음의 사람인 내가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덕에는 무엇이 공급되어야 할까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학문이나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말합니다. 사실 덕을 강조하다보면 문제가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일들 중에는 옳고 그름이 명확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조금 더 잘못하고 덜 잘못하고는 있을 수 있지만 함께 연약함을 고백하면 좋은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어떤 일들은 분별하고 구별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좋은 것이 좋고,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은 문제를 제기하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구별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덕에는 지식, 즉 분별력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지식에는 무엇이 공급되어야 할까요? 절제입니다. 다른 사람과 상황에 대해 지나친 분별력을 발휘하다보면 반드시 관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도 다른 사람에 의해 가르침을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신의 상황 속에서 벌써 자신을 용납하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가르치려 합니다. 분노하게 되고 관계가 쉽게 금이 갑니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일에 절제가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해, 지금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해 다 알고 있다면 나의 판단을 정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다 알지도 못하거니와 모든 상황을 잘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릅니다. 정확한 분별과 판단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것이요, 나는 겸손히 하나님이 내게 맡기시는 일만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 내 판단이 미숙하고 틀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 그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절제하게 합니다.
절제에는 무엇이 공급되어야 할까요? 인내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화를 잘 내거나 성격이 급한 사람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알고 보면 정말 많이 참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그들은 자신이 언제 어떻게 참았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화를 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절제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그저 한번을 참아 넘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전 13장 사랑장에서 인내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여기서 사랑을 설명할 때 인내에 대해 함께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내는 사랑으로 모든 것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입니다. 절제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혹 여러분, 어떤 일에 대해 분노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절제하고 계십니까? 삼세번을 외치지 마시고, 한번만 더하면...이라고 독백하지 마시고 모든 일에 대해 오래 참는 아름다운 인내를 발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인내에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인내에는 경건이 필요합니다. 인내와 경건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동양에도 인내의 개념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인내를 말하는 대표적인 사자성어입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절치부심이란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인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사기(史記)에 그 유래가 있는데, 이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번어기’라는 사람은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다가 결국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다른 원수를 갚으려 합니다. 와신상담 또한 비슷한 뜻입니다. ‘원수를 갚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말합니다. 이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춘추전국시대의 부차 또한 원수 갚는 일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인내가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딤후 3:1-3) 디모데후서에서 말하는 말세는 고통하는 때입니다. 사람의 모든 욕구와 관계가 고통으로 변합니다. 이러한 말세의 증상 중 하나는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맺힌 것을 다 갚아주기까지 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인내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권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들에게 권면하는 인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벧전 2:19-20에 나타나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여러분 중에 개역 성경을 가지신 분은 ‘애매한’이라는 말이 ‘부당한’이라는 말로 번역된 것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다 복수하고 갚아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생각함’ - 이것이 바로 인내에 공급해야 할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 은혜와 사랑과 돌보심을 생각함으로 오늘의 애매한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내요 참된 믿음입니다.
경건에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형제 우애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삶 속에서 경건, 즉 ‘하나님을 생각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성도들이 가장 연약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는 것 알고 계십니까? “나는 믿음이 있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바르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만 신앙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바른 관계 속에 있기는 좀 힘이 드네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 성도의 경건은 반쪽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 속에 무엇인 있는지를 알고 실천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와 우리 성도들은 형제 사랑에 성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형제 사랑에는 무엇을 공급할까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에 왜 사랑을 또 공급하라는 것일까요? 사실 사람에 대한 사람의 사랑에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에 한계를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알지만 저런 사람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불평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형제 사랑에 사랑을 더욱 공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용서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사랑의 에너지, 마음의 능력을 사용하는 일을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내 사랑은 한계가 뚜렷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공급해야 합니다.
그러면 차분히 처음부터 다같이 외워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 위해 공급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사랑’에는 무엇을 공급하면 그 사랑이 더 온전해질 수 있을까요? 예, 처음 믿음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가는 나사와 같습니다. 한바퀴 돌면 더 그리스도를 닮은 더 높은 인격과 성품으로 하나님께 한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3. 교회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문제의식(벧후 1:8-9)
그런데 교회와 성도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8잘과 9절은 두종류의 성도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성도는 8절에서 “이런 것이 있어 흡족한 성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위에서 열거한 그런 성품들이 충분히 잘 공급되고 든든히 성장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이런 성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성품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믿음의 열매도 없는 성도’가 됩니다. 영어 성경에 좀더 이해하기 쉽게 나타나 있습니다. “For if you possess these qualities in increasing measure, they will keep you from being ineffective and unproductive in your knowledge of our Lord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내 안에 있어도 그것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곧 ineffective하고 unproductive한 믿음입니다. 이런 성품이 없는 성도는 아무리 예수를 알고 믿는다고 해도 삶으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있어서 흡족하면, 즉 하나님의 성품으로 잘 준비된 성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들어오면 그것이 열매로 나타납니다.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됩니다. 그를 통해 복음이 세상에 증거되는 것입니다.
또 한 종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이런 성품이 없는 성도들입니다. 9절을 봅시다. ‘이런 것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품이 그 안에서 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잘 구비되지 못한 성도는 마치 소경과도 같습니다. 늘 눈 앞에 이익, 걱정과 염려, 두려움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여전히 벗지 못합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예수로 말미암은 평안도, 기쁨도 없는 성도가 되고 맙니다.
4. 그러므로, 굳게 하라! (벧후 1:10-11)
이제 결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즉 하나님의 성품을 공급하는 일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 하반절을 봅시다.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성도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낙심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하고 있는 사업이 잘 안되어서, 혹은 맡은 직분에 만족할 결과가 없어서,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가정 생활이 원만하지 못해서.... 우리는 쉽게 낙심하고 실족합니다. 관계를 깨뜨리기도 하고 받은 직분을 포기하기도 하며 신앙 생활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기도 합니다. 성경이 진단하는 바는,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환경에 문제가 있거나, 다른 사람이 나쁜 일을 했거나,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히 잘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 우리에게 지극히 보배롭고 큰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잘 공급하고 굳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허락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 자신은 연단하고 준비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베드로는 사족을 하나 답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전 1:11)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간다”는 표현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you will receive a rich welcome into the eternal kingdom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a rich welcome’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기뻐하시고 완전 환영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런 환영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과 저는 모두 하나님의 큰 환영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믿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얼마나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우리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좀 합시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복음을 주신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 믿음입니다. 무엇을 공급합니까? 믿음에 덕을, 덕에는 지식을, 그런데 이 지식은 정보를 아는 지식은 아닙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에는 절제를, 절제에는 인내를 공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인내가 쉽지가 않습니다. 거룩한 인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그것이 아름답다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두자로 줄이면 무엇입니까? 예, 경건입니다. 경건에는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는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예,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에는 무엇을 공급해야 할까요? 예, 다시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과 선물을 주셨지만 성도와 교회의 삶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있어 흡족한 성도와 이런 것이 없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으로 준비되지 못한 성도들은 마치 소경과도 같습니다. 멀리 보지 못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들어와도 예수를 닮은 삶을 만들어낼 수 없는 INEFFECTIVE하고 UNPRODUCTIVE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 모든 말씀을 요약하되 하나님의 성품을 공급하는 것이 마치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a rich welcome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안될 것 같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품에 관련한 이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급하고 단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던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님의 자랑과 기쁨이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랑이란 복음의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한 자랑입니다. 또한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에 대한 자랑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복음으로 변화된 삶을 살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이 말씀을 전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란 역시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기쁨입니다. 변화될 우리들을 기대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우리를 성도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고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변화가 있는 교회로, 성도로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먼저 하나님의 성품으로 준비되어 교회와 이웃과 세상을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 각 사람, 우리 각 사람 안에, 각 사람을 통해 나타나고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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