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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24. 나를 향한 여행(시 42편) na kim 20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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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4.

* 본문 : 시편 42편

* 제목 : 나를 향한 여행


오늘은 먼저 재미있는 시 한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제목은
‘생각연습’입니다.


오늘은사랑하는사람을만나고미워하는사람을만나고그저묵묵한감정도만났다나는말을

하고그들은듣고나는몸짓을하고그들은느끼고나또한그들과마찬였다그런데그모든시간

을나눈다음에도나는그들을얻지못했고그들도나를얻지못했다정치를이야기하고경제를

이야기하고사랑과이별을이야기하고38선과미국을이야기했을뿐이다지금내가이렇게돌

아앉은것은내잃어버린가슴을만드려는것이고내가슴속에숨어버린길을찾으려는것이다.


제가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26년 전 여름에 쓴 시입니다. 뭐 시같지는 않지만 아직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제가 쓴 글 중 하나이지요. 이 시를 쓸 때의 기분이 생각납니다. 저는 그 때 처음으로 가출을 했었습니다. 지금 롯데가 야구를 하고 있는 사직 운동장 야구장의 인조 잔디를 까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장만하고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동해안으로 도보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내리 쬐는 아스팔트길을 묵묵히 걷고 또 걸어서 해안 길을 따라 올라갔었습니다. 한 일주일을 올라가다가 지치고 힘들고 돈도 떨어져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여행은 정말 제게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왜하면 그 여행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시였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들어가 보니 너무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온갖 정치적 구호도 난무하고 날마다 시위는 계속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너무 고통스러운 고민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동해안 도보 여행이었고, 혼자 걷고 또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여행 끝에 저의 대학 생활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참 고생스러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여행은 저를 찾는 여행, 저에게 질문하고 제가 대답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감탄할만한 대단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저의 대학 생활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대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1. ‘꿈과 환상의 감각 제국’


현대 문명 혹은 대중 문화를 지배하는 키워드를 말하라면 아마도
‘이미지와 감각’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세계 휴대폰 시장의 선두주자였던 노키아라고하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시장에서 애플과 삼성에 이어서 3위로 추락하고 있고, 또 다른 주자인 LG에게까지 위협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체 휴대폰 시장에서도 좀 있으면 삼성이라는, 10년 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동양의 한 회사에 1위 자리를 내주게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스웨덴이라는 한 나라의 국가 기업이었던 노키아, 그들은 왜 이렇게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바로 현대 대중문화의 키워드인 ‘이미지와 감각’에 대해 무지했거나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으로 대별되는 휴대폰의 새로운 트렌드는 사람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삼빡한 이미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속도와도 관련이 있고, 편의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주는 감각적 이미지에 대해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대중들이 즐기는 모든 문화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쓴 강신주씨는 ‘꿈과 환상의 감각제국’이라는 말로 이런 사회 문화적 현상을 설명합니다. 감각과 환상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 흐르고 있는 공기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선은 곧 관심을 의미하며 생각을 의미하며 마음의 중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시선이 더 이상 사물과 사건의 내면 깊은 곳을 보려않으려 한다는데 있습니다. 표면적인 문제, 드러난 갈등, 1차원적인 필요의 해결에 우리의 모든 관심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도의 신앙과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눈에 보이는 세계, 나를 만족시키고 나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모든 시선과 관심을 쏟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최근에 가장 크게 기뻐하거나 가장 크게 낙심한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내가 최근에 가장 분노한 일이나 가장 염려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내면, 영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필요와 사람들과의 표면적인 관계에 대한 것입니까?


2. 시선, 그리고 삶의 깊이


그런 의미에서 요즘 관심있게 연구되고 있는 분야는
‘느리게 걷기’와 ‘깊이 생각하기’입니다. 그것의 의미는 ‘감각과 이미지가 지배하는 삶에서 깊이 있는 삶으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20세기, 지난 시대의 교회와 성도의 기도의 제목, 비전과 목표는 성공과 번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성공과 신앙에서의 성공을 동일시했고, 교회의 성장과 바른 신앙을 동일시했습니다. 교회는 성장했고, 사회는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만족함이 없는, 자족함이 없는 교회와 성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고 있고, 교회는 자기 반성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세상의 삶의 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런 가벼움의 시대, 감각과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면서
참된 진리와 영원한 생명에 뿌리내린 의미있는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시편 42편은 이 문제에 대해 첫걸음이 되는 중요한 질문과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께 동영상 하나를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한참 뜨고 있는 김정운 교수라는 분인데요, 얼마 전에 공개 강의를 했습니다. 이 분의 강의는 소위 Life Management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 답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강의 가운데 한 부분을 먼저 봅시다. (김정운 교수 강의 55:24~59:49)


3. 살면서 생각하기, 생각하며 살기


이분의 강의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예,
‘휴식(休息)’일 것입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우리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때로 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덕이는 삶을 산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위험이 무엇인지를 발 보여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2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시편 42편의 시인은 삶에 고난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고 떠납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이 다 내게 있는 것 같습니다. 억울하고 분하며, 슬프고 절망스럽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선택했던 것이 바로
‘낙망’하는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보십시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고”(42:3), 하나님은 나를 잊었으며(42:9),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살아가고 있고(42:9),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대적들이 나를 비방한다”(42:10)고 했습니다. 그에게 낙망할 이유는 충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처한 삶의 환경들을 모아보니 결론적으로 ‘낙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생각하며 살 것인가? 살면서 생각할 것인가?” 살면서 생각한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환경과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이 결정하는, 다른 사람이 나를 결정하고 조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주어지는 상황을 근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하며 살기’는 좀 다릅니다. 이것은 내 속에 있는 가치가 내 삶을 결정합니다. 내 속에 있는 비전이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합니다. 두 삶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우리 삶의 곳곳에 있는 문제에 지배당하는 마음과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문제가 지배하는 인생에 대한 자기 성찰과 반성, 그리고 방향을 만들어내는 마음과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생각하며 사십니까? 살면서 생각하십니까?


김정운 교수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삶에 위기가 찾아오고 너무 바빠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삶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 안에 있는 자아가 말을 걸어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휴식해야 합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쉬면서 마음을 들여다보면 정말 답이 나올까요? 아마 김정운 교수의 휴식이 줄 수 있는 답은
“그래, 실망하지 말고 힘을 내서 다시 한번 해보자!” 정도일 것입니다. 그이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 42편의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휴식을 얻고 내리는 결론은 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 시편 42편은 먼저 살면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며 살자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에게 조용히, 하지만 신중하게 말을 겁니다.
“내 영혼아, 네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너는 너무 네가 만난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 아니냐? 너는 사람을 보고, 시련을 보고, 문제를 보고, 환경을 보고 있는 것 아니냐? 네가 정말 봐야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닌, 문제가 아닌, 환경이 아닌 그 뒤에 계신, 아니 항상 너와 함께 계신 하나님인데, 너는 왜 먼저 낙망하고 낙심하는가? 라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이시며 참 도움이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데, 왜 사람을 바라보며 사람에게 소망을 두고 사람의 비방과 비난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를 반문하고 있습니다. 비로소 자신에게 대답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42:11) 지금의 고난과 시련이, 사람이 떠나고 세상이 비난하는 일들이 절망과 낙심의 제목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찬송의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4.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말씀 드린 대로 시편 42편의 주제가 김정운 교수의 강의처럼 단순히 “영차, 힘을 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해보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 힘이 나에게서 나올 때 나는 다시 낙심하고 다시 쓰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지금 내 삶 깊은 곳에 있는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자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진실을 보자는 것입니다. 나에게 누가 함께 하고 있는지, 나의 등 뒤에 누가 서 계신지를 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면, 너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이면, 너의 능력과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면 낙심이 아닌 찬송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시 한편을 소개할까요? 저의 조상뻘 쯤 되는 분의 시입니다. 이런 시가 있지요.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립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시내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갑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구절이지요? 예,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기념하여 만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2장 첫구절입니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진 글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이 말하는 삶과 같은 맥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뿌리를 내린다면, 우리의 인생이 언덕길 조그만 샘이 된다면 그 뿌리는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일까요? 그 샘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들, 성도와 교회를 아무리 큰 바람이 불고, 아무리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려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뿌리, 마르지 않는 깊은 샘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생이요, 하나님이 우리들의 샘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바람이 불 때 나무의 뿌리를 살핀다 했습니다. 가물 때 오히려 더 깊이 샘을 파는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려우십니까?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아픔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삶의 뿌리가 되시며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바라며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삶에 찬송과 감사가 넘쳐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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