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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23. 영적 성장 - 3.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배우다. 이응도 목사 20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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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3.

* 본 문 : 에베소서 3장 14-19절 말씀

* 제 목 : 영적 성장 - 3.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배우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성경을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분석하실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석할 때 원어를 사용하면 좋지만, 원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어성경은 참고하시면 보다 명확한 뜻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영어는 신약 성경을 기록하는데 사용한 헬라어와 같은 언어 문화권이라고 말할 수 있고, 보다 본문의 의도를 가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같은 다소 복잡한 구조를 가진 문장을 이해할 때는 영어와 한글 성경을 함께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자, 그러면 오늘은 본문을 좀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본문에는 크게 세 가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16~17절 상반절이 첫 번째 기도제목입니다. 내용은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 제목은 17절 하반절부터 19절까지입니다. 일반적으로 문장이 복잡해지는 경우는 문장을 꾸미거나 설명하는 형용사구나 절, 부사구나 절이 많아질 때입니다. 지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17절 하반절부터 19절을 봅시다. 이 본문에서 먼저
두 가지 부사절, 즉 문장을 분명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부분을 떼놓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1)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being rooted and established in love)” 와 2) “모든 성도와 함께(together with all the saints)”라는 내용입니다. 무엇인가 기도의 내용이 있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배경이 됩니다. 바울이 드리는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와 성도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배경으로 드리는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이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능력일까요? 두가지 내용이 포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1)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붙드는 능력과 2) 그 사랑을 지식이 아닌 삶으로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붙드는’으로 제가 표현한 말은 KJV에서는 'comprehend'로 번역하고 있고, NIV에서는 'grasp'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comprehend는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understand 보다는 좀 깊은 의미의 이해입니다. grasp은 움켜쥐다는 뜻입니다. 내 속에서 그 사랑이 경험되고 각인되는 정도의 의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울의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이 아닌 삶으로 알게 해 달라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기도제목은 두 번째 기도 제목의 연장에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교회와 성도의 삶 속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세 가지 기도 제목 중에서 첫 번째 기도 제목으로 지난 2주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두 번째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을 생각할 때 앞서 설명을 드린 것처럼 두 개의 부사구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합니다. 기억나십니까?


먼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져서(being rooted and established in love)”라는 첫 번째 구절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 기도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먼저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의 기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예,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같은 믿음을 고백하고 같은 주를 섬기는 성도와 교회에 분쟁이 있습니다. 다툼이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왜 예수를 같은 주로 고백하는 교회가 서로 다투고 분열하는 것일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함을 보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그 누구도 믿음에 대해 온전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그래서 믿음이 역사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여전히 우리의 믿음은 교회를 건강하고 바르게 세우는 일에 연약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건강하고 바르게 세우기 위해 모든 성도가 함께 동의하고 땀 흘려야 할 원칙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초 위에 사랑의 울타리를 치는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의 기초 위에 뿌리를 내리고 든든히 세워져 갈 때 교회를 연약하게 만드는 모든 사탄의 전략에 대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략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믿음의 터전 위에 사랑의 울타리를 든든히 세우는 것, 이것이 교회와 성도가 실족하지 않고 온전히 세워지는 길입니다. 교회는 그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든든히 세워지게 됩니다.


저는 굳이 따지자면 목회에 대해 원칙주의자입니다. 원칙이 강해야 융통성이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늘 여러분에게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을 먼저 말씀드리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위 ‘말씀 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를 원칙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적용하고 그 말씀으로 다른 성도나 교회를 판단하는 중에 정말 중요한 실수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이렇게 되었는데 잘못되었다... 저렇게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섬기는 것’ 또한 성경이 거듭 강조하는 성도와 교회의 신앙 생활의 원칙입니다. 진리와 믿음 위에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 성경적인 원칙의 동전의 한 면이라면, 사랑의 울타리를 든든히 세우고 교회가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서로를 돕고 협력하는 것은 동전의 다른 면입니다.


2. 모든 성도들과 함께 손을 잡다.


따라서 이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보호하는 사랑의 울타리, 그것은 결국 성도와 성도의 협력 가운데 세워지는 사람의 울타리입니다. 본문에서는 “모든 성도와 함께(together with all the saints)”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교회와 성도의 분열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성품이나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고, 서로 비슷한 교회끼리 친해지는 경향이 발견되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삶의 상황이나 이익에 따라 교회와 성도가 친밀해지기도 하고 서로 적대하기도 하는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지금 기도합니다.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은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해야 할 사랑은 모든 성도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6장 32-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 6:32-33)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대상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라는 말은 먼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 내가 원하는, 마음에 드는, 친근한, 서로 잘 어울리는 성도를 사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가 아니어도, 믿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모든 성도를 차별없이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모든 성도와 함께’라는 말은 같은 시대에 속한 모든 교회와 함께, 그리고 역사적인 모든 교회와 함께 이 일을 감당할 것을 요청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도와 성도가 연합하듯이 교회는 연합해야 하고, 함께 일해야 합니다. 오늘의 현대 교회는 교회가 가진 역사적인 유산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요 함께 사랑의 울타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3. 사랑을 붙드는 능력, 지식이 아닌 삶


자, 이제 사도 바울의 본격적인 기도의 제목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도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에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사구를 제외하면 이렇습니다.
“And I pray that you may have power to (1)grasp how wide and long and high and deep is the love of Christ, and to (1)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능력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grasp'하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을 좀 깨달았으면 하는 강력한 바램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you may have power to grasp the love of Christ”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랑의 성격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람이 움켜쥘 수 있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grasp하는 능력이 있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생각나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기 위해서 길을 갑니다. 그런데 혈루증이라고 하는 산부인과에 관계된 질병을 앓은 한 여인이 예수님께 소망을 가지고 나아옵니다. 당시에 부정하다고 배척을 받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 가를 만집니다. 성경이 이 여인의 마음을 해석하기를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1)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셔야 합니다. 혈루증을 앓던 이 여인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있는 작은 믿음으로 갇혀 있던 집에서 나와서 예수님께 접근하고 그 곳을 만지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붙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은 것도 아니요, 예수님의 발을 안고 쓰러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옷깃을 잠시 믿음으로 만졌습니다.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사랑의 한 부분을 붙들었던 그녀의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능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데 이 믿음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지식이 있었습니까? 그녀는 간절한 그녀의 삶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되는 것입니다.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 됩니다. 생각하고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사랑을 삶 속에 꽃 피울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 기도하기를
“you may have power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라고 했습니다. “지식을 넘어서는 이 사랑을 아는 능력이 있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초대교회도 이런 사랑하는 삶의 능력, 지식이 아니고 말이 아니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삶에 기록된 사랑의 능력들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4.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참된 사랑을 배웁시다.


결국 오늘 말씀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귀한 개념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통속적으로 변해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고, ‘은혜’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가장 많이 오용되고 있는 단어는 바로 ‘사랑’입니다.


사실 가장 가까운 부부 간에나 부모 자녀들 사이에도 사랑의 개념은 참 많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희생하고 주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내 마음대로 control 할 수 있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직 나만 바라봐...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의지하고 응석을 부릴 수 있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품어달라고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랑의 한 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하는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저는 다음 주에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로 표현된 사랑, 지식이 아닌 삶으로 배우는 사랑에 대해 자세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 사랑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참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에 젖어야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본받고 공급받고 그 사랑으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의 사랑은 예수님이 출발이면서 동기이면서 목표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이 기도에서 성도가 배워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가져야 할 영적 능력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랑을 붙들고 그 사랑을 얻고 그 사랑으로 사는 것 - 성도가 세상에서 성도로 살기 위해 반드시 배우고 구비해야 할 능력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다 함께 서로를 위해 일하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기쁨이 초대교회와 성도와 가정 위에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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