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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3. 영적 성장 - 5. 충만함 이응도 목사 201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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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3.

* 본 문 : 에베소서 3장 14-19절 말씀

* 제 목 : 영적 성장 - 5. 충만함


어릴 적, 아버님이 목회를 하시던 교회당 화단에는 여러 꽃들이 만발했었습니다. 화단 가꾸는 일을 즐기셨던 할머니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장미며 채송화, 동백이며 국화까지 계절마다 새로운 꽃들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화단 앞부분에 봉숭아 꽃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할머니는 봉숭아꽃이 피면 여동생의 손톱을 물들여 주셨습니다. 꽃잎을 따서 모으고 깨끗한 돌로 찧어서 즙을 만들고 그것을 손톱에 올려서 묶어두면 빨갛고 예쁜 손톱이 되었습니다.


봉숭아로 손톱을 가꾸는 일은 간단한 원리가 있습니다. 꽃잎이 아무리 붉고 아름다워도 그것을 그대로 올려 놓아서는 안됩니다. 꽃잎은 스스로 손톱에 스며들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꽃잎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에도 손톱을 물들이지 못합니다. 봉숭아 꽃잎이 손톱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으깨지고 부숴져야 합니다. 꽃잎의 모습을 잃었을 때 오히려 스며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꽃잎으로 남아서는 할 수 없는 일, 부숴지고 으깨져서 소녀의 손톱에 스며들고, 겨울 첫눈 오기까지 고운 향기로 피어있는 것입니다.


최용덕 간사의 찬양 간증 집회를 마치면서 문득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동생의 곱게 물든 빨간 손톱 생각도 났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여정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많은 사람의 삶에 고운 손톱으로 물들어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용덕 간사의 간증 집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교회에 있었던 집회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번 집회는 간증집회였으므로 성도들의 마음과 삶에 남은 여운을 살피면 쉽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집회가 마치 손톱 위에 올려진 봉숭아 즙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잘 스며들었습니다. 삶에 시리고 아픈 첫눈이 또 다가올 때까지 성도들의 마음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손톱이 자라고 사라져도 마음 위에 은혜와 긍휼로 붉게 물든 또 다른 손톱이 생겨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간증 집회라는 것이 한 사람의 성공을 자랑하고 그와 같은 성공을 갈망하는 집회가 되기 쉽습니다. “내가 이렇게 믿어서 이렇게 성공하고 복을 받았으니 당신들도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라는 류의 간증 집회는 제가 목회자로 섬기는 한 저희 교회에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성공이 우리 믿음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 또한 믿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최용덕 간사의 간증은 처절한 자기 반성,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실패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해도 결국 다시 실패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도 결국 다시 넘어지는 삶, 그래서 더 낮아지고 더 아파하고 더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한번 은혜를 깨닫고 그 이후에는 아무런 갈등과 시험이 없는 평탄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삶은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스며들 수 있는 힘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힘이 있고 그의 눈물이 가치 있는 것은 그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름다운 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으깨지고 부숴진 심령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업적과 열매가 아닌 처참하게 무너진 한 연약한 인간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목회자로서 섬기는 교회와 성도가 함께 은혜를 나누게 되어서 좋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름다워서 좋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을 이해하시고 연약함을 만지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최용덕 간사의 집회는 제 마음의 손톱 위에 잘 으깨진 즙으로 놓여 있고, 천천히 곱고 붉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 빛깔 더욱 곱고 그 은혜 더욱 좋습니다.


1. 바울의 네 가지 기도 제목


오늘은 ‘영적 성장’이라는 큰 제목으로 드리는 다섯 번째이면서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동안 같은 본문을 천천히 함께 묵상하면서 우리는 세 가지 큰 기도의 제목이 본문 속에 녹아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1)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2) 믿음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사랑을 알고 경험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네 번째 기도의 제목을 만납니다. 이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4)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네 가지 기도의 제목은 서로 연관성이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성도의 외면이 아닌 ‘속사람’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비치는 모습 때문에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속사람’입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도록 우리를 개방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있어야 한다구요? 예,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섬기게 되고, 믿음이 있을 때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도우시는 터전이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의 주로 만날 수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부어주는 통로입니다.


자, 믿음을 통해서 무엇이 우리에게 다가온다구요? 예,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 사랑이 우리의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 그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닫고 실천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2. ‘충만하다’는 것


그리고 네 번째 기도의 제목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우리들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한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한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 부분에 번역에 약간은 생각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본문을 NIV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I pray 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그리고 NASB 성경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you may be filled up to all the fullness of God.”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충만하심까지,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지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저희 교회와 저를 참 좋아하시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나이는 저보다 꽤 많으신데 친구처럼 참 좋아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십니다. 누군지는 다들 아실만하지 않습니까? 그저 생각만 하십시오. 그런데 사실 그분과 저는 같은 과(?)가 아닙니다. 그 목사님은 부흥사 출신이시라 늘 은혜와 능력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좀 뜸하다 싶으면 금식하고 있고, 조용하다 싶으면 작정 기도하고 있습니다. 집회를 자주 나가시는데 안수기도도 하시고 예언도 하시는 분입니다. 저와는 소위 코드가 잘 맞지 않는 목회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목사님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더 친해질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저는 그 분의 삶을 좀 자세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 어려움도 많이 겪었고, 아픔도 많은 분입니다. 현재 목회에도 힘든 과정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약점이 많고 연약한 부분이 많은 분입니다. 비어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장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분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변화의 과정을 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목사님은 지금도 조금씩 채워지고 있습니다. 비어 있는 부분, 연약한 모습이 점점 변화되고 채워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일까요? 예, 평생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날까지 날마다 채워지고 날마다 변화될 것입니다.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저보다 치열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채워가려고 노력하는 그 분의 모습이 좋아서, 저는 그 분과 앞으로도 친하게 지낼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충만하신 데까지 충만해진다는 것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참 빈 곳이 많고, 연약한 모습도 많습니다.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성품이 엉망이고, 은혜를 받은 줄 알았는데 상처투성이입니다. 사명감으로 투철한 줄 알았는데 교만하고,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끊임없는 불만이 생깁니다. 여전히, 아직도, 아니 평생 주님 만나는 날까지 변화되고 채움을 받아야 할 영역이 남아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2011년 부흥 집회에서 우리 교회가 얻는 가장 큰 지혜이자 은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낮에 해처럼 밤엔 달처럼’이라는 은혜와 감동이 있는 찬양을 지은 최용덕이라는 사람이 그 이후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삶을 살고 있는지 생생하게 듣고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것이 우리들에게 은혜가 됩니까? 하나님이 지금도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그를 채우고 있고, 그가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지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먼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연약함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욕심과 악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이지만 여전히 성령으로 채움을 받지 못한 인격과 삶의 영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성장해야 할 인격과 변화되어야 할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교회와 성도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넉넉하게 채울 때까지,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은 온전한 교회와 성도가 되기까지 성장하고 또 충만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충만함, 교회에 맡기신 사명


그런데 이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13에서 다시 ‘충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도와 교회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설명하기를 첫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둘째,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라는 일을 한 개인의 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통해 이뤄지는 일입니다. 14절과 15절에 이것이 더 자세하게 언급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4-15)


이 말씀에서 성도의 영적 성장에 가장 중요한 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도움과 연결과 결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연약함과 부족함,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충만하심으로 채우시는 방법에 대해서 바울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와 성도가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책임지는 방식입니다. 다시 엡 4:14-15를 보십시오.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 우리의 인격과 성품에 예수님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 돕습니다.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서로를 도와서 몸이 성장하고 스스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교회, 서로 돕고 연결되고 결합되다.


지난 부흥 집회는 제게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최간사님과 2주를 함께 지내면서 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고, 많은 격려와 위로를 받았습니다. 쉽게 지치고 낙심할 수 있는 이민 목회를 하면서 과연 내가 무엇으로 힘을 얻고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최간사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와 교제하면서 왜 이렇게 편하고 익숙할까 생각하다보니 우리 교회의 분위기가 자신이 자라던 대구의 한 조그만 교회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최용덕이라는 한 상처투성이인 고등학생이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시절에 그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치유했던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돕고 연결되고 결합되는’ 지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라 부르는 권사님들, 자기 아들처럼 보살펴 준 집사님들, 늘 말씀과 기도로 가르쳐주던 교사들과 목회자들.... 최용덕이라는 한 소년은 그들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의 품을 경험했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하나님과 연결되었으며, 그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품에서 하나님과의 결합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삶에 고통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교회를 통해서 배운 것은 부숴지고 깨진 심령들이 함께 모여 돕고 연결되고 결합된다는 것입니다. 으깨지고 짓이겨지지만 함께 모여 서로의 삶에 붉은 사랑의 물일 수 있는 고운 봉숭아 즙이 되는 것입니다. 최간사님이 저와 함께 성도들을 만나고 시간을 나누면서 ‘돕고 연결되고 결합되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느껴진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또 제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돕고 연결하고 결합함으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이 사랑 안에서 치유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결핍에 채움을 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상처가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부숴지고 무너지는 고통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좀 더 담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고통이나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이미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도들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 때문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큰 은혜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디에, 누구를 통해서 주셨을까요? 성경은 그 은혜가 교회를 통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서로 돕고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성장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과 저입니다. 35년 전의 대구의 어느 교회가 한 소년을 책임졌고, 그 소년이 받았던 사랑과 도움이 35년 후 미국 랜즈데일의 초대교회를 돕고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서로의 성장에 책임을 지고 돕고 협력하고 세움으로 말미암아 성도를 성장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함께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니의 모든 충만하심이 초대교회와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하며,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 변화하는 교회와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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