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0.
* 본 문 :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
* 제 목 : 더 깊은 감사
지난 7월에 제가 설교에서 소개한 글이 하나 있습니다. 최용덕 간사님이 운영하시는 ‘갈릴리 마을’이라는 인터넷 공동체에서 ‘희망으로’라는 아이디를 쓰시는 ‘김재식’님의 글이었습니다. 제목이 ‘누구나 어디 한쪽이 문드러진 채로 살아간다.’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오늘 그 분의 또 하나의 글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 분은 여전히 전신의 근육이 무력해져가는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간호하고 있고, 중학생 딸을 갈릴리 마을 여러 지체들의 도움을 통해서 돌보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 신뢰와 책임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는 중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누군가 가장 밑바닥에 있다...
김재식
밤 11시 넘은 시간 /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이어 우당탕 저벅저벅, / 누가 이 시간에 잠 안자고 남들을 괴롭힐까? 앞쪽 환자가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 화장실을 가는 것 같다.
'어쩔수 없지... 생리대사를,'
그런데 끝이 아니다. / 잠들만 하면 밤1시 새벽 3시... / 간신히 조용할만하면 또 6시에 간호사 혈당체크 인슐린주사, / 밥먹다 시끌벅적 웅성웅성 소리가 들린다. / 병실로 들어서면서 잔뜩 화가난 목소리
'밖에 나가지마! 샤워실에서 복도로 변이 줄줄 흘려있어!'
누군가 급해졌는데 발걸음이 느려 변기에 도착도 하기 전에 / 바지로 주룩 새었나보다. / 뇌경색으로 입원한 옆 옆방 아저씨... / 벌써 몇 번째이다. / 이러고도 살아야하나? / 돌보는 이 없으면 단 한 달도 못살지 모르는데, / 무엇을 할 수 있고 세상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을까? / '........' / 누가 대답을 해줄수 있을까?
그런데, / 소용 여부로 살고 죽어야 한다면 / 아무도 죽는 걸 말릴 이유도 없고, / 그것이 죄도 되지 않을 것이다. / 굳이 약자를 돌보라는 명령과 /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신다는 약속은 왜 필요할까? / 무언가 그래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만 약자이고 / 소용이 없이 남을 괴롭히기만 하는 사람들일까? / 정말 그럴까? / 그럼 병원생활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가? / 직장에서 학교에서, 혹은 가정에서조차 / 열등감과 약자로 몰려서 / 한없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고통에는 일렬이 없다. / 위 아래가 없다. / 그래서 나의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느끼지만 /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 / 나는 아내보다 덜 힘들고, / 누군가는 나보다 덜 힘들다. / 그건 심정의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 누가 누구를 도와줄 정도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어려움이, 고난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고 / 말하지 말일이다. / 누군가를 도와줄 힘만 있거나, / 나의 도움조차 필요한 사람만 있다면...
궁금하다. / 내 아래 깔린 아내보다 더 힘든 사람은 누구일까? / 예전에 지나온 병원들을 떠올리니 있었다. / 그럼 그 사람보다 더 아래는?
아!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래, / 가장 깊은 바닥에 있는 그 누구! / 가장 바닥에 몰릴만한 자기 잘못도 없고, / 그걸 벗어날만한 힘도 있고 빽도 있는데도 / 고스란히 치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며 찍소리도 안하고 / 마침내 죽음까지 당한 사람,
예수...
그 바닥을 딛고 그 위에 한 사람이 있고, / 또 그 위에 조금 덜한 사람이 있고, /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세상을 떠나야할 자격은 없어졌다. / 밉고 화나다가도 / 거동도 못하는 사람을 인정하기로 했다. / 저 사람의 도움조차 받아야 할 더 어려운 사람도 있는데 / 살아야하고말고! / 하긴 내 아내도 별 만만치 않으니.....
1.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11월 셋째 주일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이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드립니다. 저희 교회는 오래 전부터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난 주일을 지켜왔습니다. 다음 주일, 우리가 한 해를 정리하고 감사하는 절기를 지키고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지난 한 해, 2011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즐겁고 의미 있었습니까? 슬프고 힘들었습니까? 이 한 주간, 지난 한 해를 점검하고 돌아보고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지난 한해 좋은 일이 많았고, 그래서 감사할 일이 많다면 그저 좋습니다. 많이 감사하시기 바라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늘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는 고통과 고난보다 더 깊은 감사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과 고난의 현실 속에서 더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조금 전에 읽어드린 글에서 여러분은 그 답 중에 하나를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어떻게 위로를 얻고 감사를 얻을 수 있을까요? 더 큰 고난과 고통을 발견할 때입니다. 내가 가장 고통스러운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큰 고난과 고통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입니다.
김재식씨는 아내의 고통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더 아래, 그보다 더 깊은 곳에 고통당하고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보다 낮은 곳에 아내가 있고, 아내보다 더 깊은 고통을 경험하는 다른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깊이, 더 깊이 아래, 또 아래에서 그가 만난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낮은 곳에, 깊은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가장 깊은 곳에 십자가를 세우신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어루만집니다. 그들보다 더 높은 만큼 그들보다 더 감사드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과 예수 사이에서 발견하는 고통의 깊이의 차이만큼 그는 오히려 고난 가운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까? 고통당하신 일이 있습니까? 우리보다 깊은 곳에서 더 깊은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위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의 고난을 이렇게 이고지고 버텨나갈 수 있는 은혜 주셨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짐 지고 가십니다.
2.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감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고통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통을 선택한다고 할 때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가일이를 출산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결혼 5년만에 감사하게도 가일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내는 출산의 고통을 온 몸으로 그대로 느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통제 하나 맞지 않고 출산을 시작했습니다. 제 머리가 다 뽑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가일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내는 가일이를 안고 모든 고통을 잊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스스로 고난을 선택해보신 일이 있습니까? 의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선택하고 고통의 길을 인내해보신 일이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3:14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벧전 3:14) 또 베드로전서 3:17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 이 두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선과 의를 위해서 고난의 삶을 선택하는 성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고난인 줄 알고, 고통인 줄 알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를 위해서 선택한 것이라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공동번역은 베드로전서 4:16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4:16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벧전 4:16) 우리가 성도라는 이유로 고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것은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인 줄 알면서, 수치인 줄 알면서, 죽음인 줄 알면서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신 분이 있습니다. 깊고 깊은 고통의 길을 말없이 걸어가셨습니다. 마치 산모가 자녀를 잉태하는 고통을 기쁨으로 감당한 것처럼 교회를 출산하는 아름다운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그 능동적인 고통의 결과가 바로 여러분과 저,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들에게 피할 수 없어서, 약해서 당하는 고통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를 위해 내가 선택하는 고통이 우리의 삶에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그 고통으로 인해 더 감사하고 더 기뻐하는 삶이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런 삶이 우리의 2011년에 있었습니까?
3. 고통에 목적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 고통을 통해 오히려 깊이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고통에 분명하고 뚜렷한 목적이 있을 때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마음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방점이 우리의 인생에 있는 ‘고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의’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없고 슬픔 없고 눈물 없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있는 인생이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히 12:2)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아는 분이셨습니다. 잘못으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고난을 이기는 법, 현재의 슬픔을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누릴 영광과 기쁨’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으로 오늘의 부끄러움과 고통을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시편 119:71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고난이 있다는 것에서 아픔과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에서 감사와 찬양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고통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성도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능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고난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사귐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래서 더 깊은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 목회에 대한 꿈이 있어서 제가 다리 역할을 했던 분입니다. 마침 미국에도 좋은 목회자를 찾는 교회가 있어서 딱 맞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민 목회가 쉽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뜨거운 맛을 보고 계십니다. 이민 목회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신 사모님께서 눈물을 글썽이며 힘들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 자신들이 사역을 한 이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가지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저희 교회를 개척하던 당시에 있었던 일들이었고, 두 번째 이야기는 필라 주변 한인 교회들의 현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얼마나 힘이 들었었는지, 얼마나 치열한 과정을 지나왔는지를 말씀드렸고, 지금도 필라 주변에 있는 한인 목회자들이 자립되지 않는 교회에서 얼마나 발버둥치며 목회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예, 그 분들이 당하는 목회적인 어려움보다 더 크고 아프게 목회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크기를 객관적으로 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더 열악한 조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있고, 그 분들의 환경과 현실을 그보다 훨씬 앞에, 위에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모님이 제 이야기를 한 참 듣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감사해야겠네요.” 저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열악하고 더 힘들게 목회하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더 큰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며 찬양하며 섬기시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분들이 기쁨과 감사의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잠시 위로는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변화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고난이 감사와 찬양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나의 고통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더 고통당하는 자리, 나보다 더 깊은 고난의 자리에서 나를 위해, 나의 구원을 목적으로, 나를 향한 사랑을 품고, 나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던 우리 주님을 저 깊은 고통의 바닥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로소 나도 그 주님의 사랑과 헌신이 나를 향한 선택임을 깨닫고 나의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고통과 고난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 그 고통을 통해 오히려 주님과의 사귐이 있고, 그 고난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삶의 지경이 넓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 /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더 뜨겁게 찬양하고 더 깊이 감사하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2011년의 감사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 하루만 감사의 날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며 우리를 그 마음의 중심에 두신 우리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 삶이라면 날마다 감사하며 날마다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2011년 감사의 계절에 더 깊은 감사, 더 뜨거운 찬양을 깨닫고 영광돌릴 수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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