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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9. 예수, 우리의 이웃 - 2. 임마누엘의 믿음 이응도 목사 201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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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9.

 

* 본 문 ; 룻기 49-13

* 제 목 ; 예수, 우리의 이웃 - 2. 임마누엘의 믿음

 

지난 수요일에 알려드린 대로 중국과 태국에서 선교하고 있는 박** 선교사님이 교회를 방문하고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원래 중화문화권을 대상으로 어린이 사역에 초점을 두고 선교하셨는데, 중국에서 사역을 하는 중에 만난 탈북자 가정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탈북자들을 돕는 일에 많은 역량을 할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박선교사님의 선교 보고에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여성 선교사로서의 마치 어머니와 같이 대상화하는 선교가 아닌 품는 선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준비한 본문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33:1)였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선교는 피선교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여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하나로 연합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특히 북한을 사상적으로 이상한 집단으로 여기거나 북한 동포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지경으로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물질을 나눠주려고 하는 것은 연합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연합의 본을 보이신 것처럼 북한 동포들을 우리의 형제로 여겨서 그들과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됨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과 동거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잠시 와서 도울 수 있고, 무엇을 보내줄 수는 있지만 그들을 나와 같은 사람, 나와 함께 살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선교라고 했습니다.

 

박선교사님과 함께 교회를 방문한 두 자녀가 있습니다. 아직 미혼인 박선교사님에게 두 자녀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 그리고 이제 11살이 된 딸 - 모두 선교사님이 가슴으로 낳은 자녀들입니다. 탈북자의 자녀로서 선교사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단순히 물질로 도와주는 사역, 혹은 기관에 소개하는 사역을 넘어서서 그들과 연합하여 동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여 끝까지 책임지기로 한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두 자녀를 만난 것은 선교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을 본 것과 같았습니다. 함께 하나가 되는 선교, 함께 우리가 되고 함께 너희가 되는 선교 - 그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참된 선교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선교의 모델입니다.

 

1. 하나님께로 다가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포로 생활을 하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던진 질문은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버려두시는 하나님,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외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실까?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외면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먼저 말씀을 떠났고,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부끄럽고 초라한 탕자의 모습이 바로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룻기를 읽었습니다. 마치 부끄러운 이방 여인, 허물 많고 가진 것은 없는 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던 보아스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위로의 말씀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룻기와 닮은 또 하나의 사랑이야기기 있습니다. 룻기가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었다면 시로, 노래로, 연극으로 표현된 또 하나의 사랑의 서사시가 있는데, 바로 아가서입니다. 룻기와 함께 그들이 포로되었을 때 불렀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입니다. 아가서에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모해서 찾아오는 장면입니다. 늦은 밤 이슬을 맞고 왕이 찾아왔습니다. 문을 두드립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대를 사랑하는 내가 여기 왔습니다. 그대가 사랑하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문을 열지 못합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왕이 문을 두드리는데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문을 모티브로 하는 또 한 장면이 성경에 소개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예수님이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유명한 320절의 말씀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부르심에 교회와 성도들이 잘 응답을 했을까요?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 교회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심이저 예수님은 뱉어버리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왜 그들은 문 두드리시는 예수님, 들어와서 함께 먹고 마시며 동행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그들의 마음과 삶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일까요?

 

2. 문 두드리시는 하나님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쉬웠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만남이 성사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고도 많았습니다. 무엇이 만남을 가로막을까요? , 이방여인입니다. 가진 것 없습니다. 이미 결혼했습니다. 남편을 잃었고,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보아스와 아무 것도 없는 룻 사이에 어찌 쉬운 만남이 가능했겠습니까? 하지만 실은 이 모든 것보다 더 무섭고도 강한 벽이 그들 사이에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과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우리는 그 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문을 열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는 먼저 왕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보니 왕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꾸미지도, 차리지도 않았습니다. 문을 열고 왕을 만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왕, 문 열기를 망설이는 술람미 여인 -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연인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고, 사랑하기에는 내 안에 너무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전혀 다른 이유로 문을 열지 않습니다. 이 교회가 있었던 라오디게아 지역은 양털로 옷감을 만드는 산업이 발달했고, 금융업도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스스로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열심을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굳이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역사하고 주장하고 인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가진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문을 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대로 성경이 어떤 의도와 재미를 가지고 기록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라는 주제로 지금 두 성경이 각각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과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릅니다. 술람미 여인은 가진 것이 없고 부끄러워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진 것들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무엇이고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을 만나다.

 

술람이 여인은 결국 문을 엽니다. 그런데 왕이 낙심한 나머지 이미 돌아가고 없습니다. 큰 일이 났습니다. 망설이는 사이 사랑이 떠난 것입니다. 비로소 술람미 여인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집니다. 모든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왕을 찾아서 온 성을 헤매고 찾기 시작합니다. 아가서 5:6-8에서는 이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5:6-8) 그녀는 이제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자신의 사랑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부탁합니다. 조롱을 당하고 멸시를 당해도 그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여러분! 그녀는 사랑을 만났을까요? , 그렇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왕을 만나고 서로 사랑을 노래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6:3) 포로기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연극으로 만들어서 함께 노래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애타게 찾으실 때 우리가 외면했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차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눈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술람미 여인이 왕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 우리를 만나주소서. 다시 우리를 사랑해주소서.... 그들은 기도하며 노래하며 눈물 흘렸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시대, 여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이되 주님을 문 밖에 세우고 있습니다. 성도이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경고하시기를 토하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부유했지만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물 사정이 좋지 못해서 이웃도시에서 물을 끌어다가 사용했습니다, 북쪽으로 11km 정도 떨어 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골로새에서 지하수를 공급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물들을 먼 거리에서 물을 공급받다 보니 물이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때 쯤에는 온천수는 식어서 미지근하고, 지하수는 더워져서 역시 미지근했습니다. 그들은 늘 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되 문 밖에 세워두는 성도와 교회는 마치 이렇게 맛없고 미지근한 물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그런 물을 싫어했듯이 예수님도 그런 교회를 토하여 버리겠다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서부에 있는 훌러 신학교에 맥가브란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깨어서 활발하게 일하는 교인이 대개 10%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살짝 자는 듯한 성도가 80% 입니다. 그런데 푹 자고 있는 교인도 약 10%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회란 ‘10%의 깨어 있는 성도들과 함께 살짝 자고 있는 80%를 깨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푹 자고 있는 10%’는 어떻게 할까요? 그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푹 자고 있는 사람 10%를 깨우면 나머지 80%를 데리고 함께 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재미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몇 %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 앞에서 10%의 열정과 열심히 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런 교회가 문을 열고 하나님을 만난 교회요, 바로 그런 성도가 열린 문으로 주님과 교통하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4. 연합하여 동거하다.

 

룻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룻은 장벽을 넘어 보아스를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함께 연합하여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신에게 있는 연약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시어머니 나오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보아스에게 나아갑니다. 왜 부끄럽지 않고, 왜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룻은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말씀이 그녀의 삶에 성취됩니다. 그녀가 말씀에 순종했더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둔데 임하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보아스 또한 말씀에 순종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말씀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받았습니다. 말씀의 위엄 앞에 순종했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했고, 끝까지 책임지는 삶의 보여줍니다. 말씀이 그의 삶에 역사하여 성취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리스도로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놀랍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오늘 제가 소개한 세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룻과 아가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표현에 있는 중요한 공통점... 발견하셨습니까? , 한꺼번에 보여드릴테니까 찾아보십시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4:1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6:3)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

 

공통점을 찾으셨습니까? 보아스가 룻 안으로 들어갑니다. 솔로몬과 술람이 여인이 서로에게 들어갑니다. 주님이 교회로, 교회가 주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하나가 됩니다. 서로 연합합니다. 동행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하되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에 대해 우리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하나님 편에서만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자꾸만 문을 두드리시는데, 우리가 문을 잠그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우리가 계속 외면하고 도망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임마누엘의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 문을 여는 믿음입니다. 벽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수치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자랑과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처럼 나도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입니다. 말씀이 나에게 다가온 것처럼 나도 말씀으로 들어가서 내 삶이 말씀이 되는 믿음입니다. 바로 그 때 나와 말씀, 교회와 말씀 사이에는 거룩한 자녀가 생깁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을 품고 세상과 연합하며 세상을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룻은 보아스에게 들어갑니다. 연합하고 동거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속하였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속했습니다. 연합하고 동거합니다. 교회는 주님께, 주님은 교회로 들어갑니다. 연합하고 동거합니다. 말씀이 초대교회와 성도들에게 들어옵니다. 교회 성도는 말씀 안에 들어갑니다. 말씀이 교회를 통해 역사합니다. 말씀이 성도의 삶에서 육신이 됩니다. 초대교회가 이 시대와 지역 사회를 품습니다. 말씀이 역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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