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01 중심잡기-8.두려움 없는 사랑 | na kim | 2013-12-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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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 본 문 : 요한1서 4장 16-21절 말씀 제 목 : 중심잡기 – 8. 두려움 없는 사랑 한 달 쯤 전이었습니다. 주일 저녁에 늦게까지 사무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계단을 내려와서 1층 문을 막 여는데 순간 놀랐습니다. 헙수룩한 옷을 입은 제 나이 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누구십니까?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그 분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좀 쉴 곳을 찾아다니다가 문이 열려서 들어왔습니다.” ‘문이 열려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주일 모든 모임이 마치면 문을 잠그고 나갈텐데....’ 정말 문이 열려 있었을까 확인을 하려다가 그만뒀습니다. 왜 쉴 곳이 필요한지 자세하게 설명해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필라델피아 시내에 사는데, 여기 이웃 동네에 내일 아침 일찍 면접이 있다고 헸습니다. 차가 없기 때문에 내일 일찍 올 수는 없고 이 동네서 밤을 샐 생각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렌즈데일 기차역에 내려서 쉴 곳을 찾다가 우리 교회당을 발견했고, 마침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나쁜 사람이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며 신분증을 복사하라고 주려고 했습니다. 그분을 진정시키고 안쪽 교실로 모신 후 잠시 제 사무실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고민이 됐습니다. 신앙에도 낭만이 있습니다. 모든 가난한 사람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를 헌신하고 나누는 삶 – 가장 래디컬한 성도와 교회의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습니다. 내 가슴이 움직이는 대로, 내가 믿는 대로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신앙에는 현실도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허락을 받지 않고 11시가 넘은 시간에 건물에 무단으로 들어왔다는 것 - 그 의도와 생각이 의심스럽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집에 가지 않고 그분을 지키기 위해 교회당에 남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10년 전, 저희 교회가 Glenside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 교회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때였습니다. 주일 새벽 예배를 드리는데, 뭔가 교회당에 우리 성도들 외에 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도 그랬습니다. 한 여성도가 말하기를 분명히 누군가 교회당 건물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회당 구석구석을 뒤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 1층 친교실 옆 비품이 들어 있는 방문을 열자 남루한 차림의 술 냄새를 풍기는 한 청년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도 놀라고 저도 놀랐습니다. 누구냐? 왜 여기 있느냐? 어떻게 들어왔느냐? 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경찰을 불렀고, 미국 교회에 알렸습니다. 다음 날 그 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교회에 대해 좋을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감사의 표현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그 목사님 말씀이 자신은 이미 노숙자인 그 청년이 몰래 교회당에서 자고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아직 교회에 크게 피해 입힌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아니면 그런 청년이 갈 곳이 없지 않느냐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대답에 그 청년을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 당황했습니다. 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을 포기하다. 지난 해 이맘 때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 세상의 이웃’이라는 제목으로 10회에 걸쳐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때 함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은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불리는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시험하며 질문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예수님은 대답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였습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에 해당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마가복음 10장 17-22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달려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질문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그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같은 내용의 대답을 주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성경은 그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이 두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부정하고 있습니까? 예,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22에 나타난 율법사의 반응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근심하며 예수님께 등을 돌립니다.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그가 예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이웃을 구하지 않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과연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왜 그들 모두는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을까요? 2.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오늘 본문은 복음서에 나타난 이 두 가지 이야기의 사랑의 실패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서는 놀라운 선언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 자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에는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16절 하반절의 말씀(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대답을 만들어봅시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들이 사랑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그들은 왜 강도만난 사람을 피해갔을까요? 레위인은 왜 그랬을까요 제사장은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어떤 말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했을까요? 제사를 드리려구요....? 시간이 없으니까...? 아마도 그런 사람은 강도를 만나도 싸니까....? 세상에 강도만난 사람은 너무나 많고 그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으니까....? 일부러 강도만난 것처럼 해서 구걸을 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서...? 강도를 만난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사람이 강도인데 강도 만난 척을 해서....나중에 다시 강도로 돌변할까봐...? 자꾸 도와주면 도움 받는 것이 습관이 될까봐...?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주기 보다 강도들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도대체 그들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이웃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마가복음 10장의 율법사에 대해서는 성경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왜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슬픈 얼굴로 돌아섰을까요? 성경은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잘 지킨다는 그에게 재물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재물을 놓고 예수님을 얻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성경은 그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는 무엇이라 말하며 예수님에게서 돌아섰을까요? 그에게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나만....? 왜 이 좋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해요...? 재물도 지키고 영생도 얻는 방법은 없나요...? 다른 선생들은 그렇게 말 안하던데....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믿어야 하는 건가요....? 아무리 그들이 수많은 변명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해도 오늘의 본문 요한 1서 4장 16절의 말씀은 한 마디로 그 이유를 정리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들이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이 없는 증거입니다. 아니면 하나님 아닌 더 중요한 것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이 일하지 못하시도록 가로막는 그 무엇이 그들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3. 두려움, 사랑의 장벽 그런데 요한 1서 4장은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를 다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하나님 아닌 더 중요한 것들을 내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삶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 뜻에 따르면 내 삶에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1 4:18) 그런데 16절 중간에서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18절의 말씀에 ’사랑‘ 대신 ’하나님‘을 넣어 보십시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 목사인 제가 교회당을 찾아온 그 분을 선뜻 반갑게 맞이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저를 해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분을 교회당에 재웠을 때 과연 안전한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 교회당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를 경찰에 넘긴 이유도 그랬습니다. 내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경찰에 넘긴 것입니다. 제사장은 왜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했을까요? 레위인은 왜 그를 못 본 척했을까요? 이유 같지 않은 모든 이유를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선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것 – 아마도 그는 이 모든 것에 동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고자 할 때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는 자기 길을 갑니다. 에수님께 영생을 질문한 율법사는 한 단계 더 나갑니다. 그는 근심을 선택하고 재물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놓고 영생을 놓았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어리석은 선택을 하도록 했을까요? 두려움입니다. 재물이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 물질의 풍요함이 없는 삶에 대한 근심입니다. 재물이 나를 보호하고 물질이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위에 영생을 더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버리라 합니다. 이웃에게 나눠주라 합니다. 그 후에 예수를 따르라 합니다. 그는 선택하고 결단합니다. 영생을 포기할지언정, 예수를 버릴지언정.... 나는 재물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험악한 세상에 재물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안전하지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배우다. 2층 사무실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려왔습니다. 마실 물과 먹을 것과 덮을 침낭을 그분에게 줬습니다. 히터를 틀어서 따뜻하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리고 잘 쉬고 내일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잠시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꾸 무엇인가 뒤통수를 잡아 댕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에 왔더니 아내와 가일이가 왜 늦었냐고 물었습니다. 이야기를 해줬더니 역시 걱정하는 표정입니다.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너무 일찍 오면 눈치가 보일까봐....적당히 일찍 교회당에 왔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묵었던 곳을 잘 정리하고 이미 가고 없었습니다. 그분이 고마웠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 분이 아마 사고를 치지 않고 가주셔서 고마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도 좀 고마운 마음이 있기는 합니다만.....그보다 더 고마운 것이 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에게 질문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좋은 영적인 경험을 하게 한 것입니다. 아침 일찍 교회당으로 오는 길에 참 많은 질문과 상상을 했습니다. 만일 교회당에 좋지 못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목회자로서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답은 오는 길에 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였습니다. 좋지 못한 일이 있으면 감당하면 되고, 책임져야 할 일이 발생했으면 책임을 지면됩니다.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일, 아무런 위험과 수고 없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모든 사랑은 위험합니다. 모든 사랑은 실패와 거절과 아픔과 상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우십니까? 사랑에 실패할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움켜쥐시겠습니까? 사랑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룻 밤 숙소를 빌려주는 일에도 사랑에는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행의 실패, 호의의 은혜에 대한 악의적인 거절, 나의 힘든 수고를 값싼 것으로 바꿔버리는 몰염치함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랑했는데 사람을 잃을 수 있고, 헌신했는데 원망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그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하기를 포기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에 대해 사탄이 늘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승리는 우리가 믿음과 영생에 관심을 가지되 레위인으로, 제사장으로, 젊은 율법사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여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아니라 형식적 종교인으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리는 눈과 근심 가득한 마음으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2013년의 마지막 달, 2014년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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