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8 중심잡기-9.붉은 줄 | na kim | 2013-12-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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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8. 본 문 : 여호수아 2장 1-24절 말씀 제 목 : 중심 잡기 ? 9. 붉은 줄 신학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면서 비로소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몇몇 전도사님들과 성경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들을 나누곤 했습니다. 하루는 그 중 한 분이 제게 흥분된 얼굴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응도야, 니 이런 말씀 아나?” “무슨 말씀요?” “내가 성경을 읽다보니까 가슴이 떨린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네....” “그러니까 뭐요?” 그 전도사님이 심각하고 낮은 목소리로 제게 말했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저 역시 그 말씀을 읽은 기억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예언을 하시면서 성도와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신 말씀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전도사님의 낮고 진지한 음성을 통해 들었던 그 말씀은 제게 아직도 생생한 전율로 남아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과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노아, 그리고 롯의 처 한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임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다양한 의미와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와 근거는 바로 왕이신 예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늘의 왕이 이 땅에 내려오셨으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함정이 있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인 내가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벌써 임했다”고 선언하면 정치적으로 로마에 걸리게 됩니다. 종교적으로 유대 사회에도 걸리게 됩니다. “아직 임하지 않았다...” 혹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마음과 관계 속에 이미 임한 것이다.” 이제 공은 바리새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들 속에 있다고 말하려니까 예수의 가르침에 동조하는 것이고, 없다고 말하려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황하고 분노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서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인자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소리 높여 떠들어댈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눅 17:23下) 그날은 정말 갑자기 임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5) 예수님은 다시 구약의 두 사람에게 있었던 사건을 통해서 그들에게 권면하십니다. 한 사람은 노아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반응한 한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비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들려주신 음성을 신뢰할 수 없는 수만가지 조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집중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려주신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 그 음성에 대한 견고한 믿음으로 120년 동안 방주를 짓습니다. 외롭고도 힘든 길을 묵묵히 걸어서 믿음이 무엇이며 구원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또 한 사람은 롯의 아내입니다. 멸망하는 성 소돔에 살았던 롯의 가정은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비록 이방 문화에 휩쓸려 살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믿음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직 한 가지 약속에 근거하여 피난처로 달려야했습니다. 롯과 두 딸은 달리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롯의 처는 약속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자가 들려진 복음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소리, 백성들의 비명 소리, 성이 불타는 소리가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두고 온 재물과 삶의 흔적들이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허락된 복음에 집중하지 않고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과 귀와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질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대답을 주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노아와 롯의 처 이야기를 들려주셨을까요?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2. 시선, 집중할 수 있을까? 지난 주간 신문에 김연아 선수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압도적인 점수로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참 예쁘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는 어릴 적부터 피겨 스케이딩을 볼 때마다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 기술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빠르게 도는 기술이 있지 않습니까? 또 요즘 한참 화제가 되는 트리플 악셀도 회전을 기본으로 합니다. 발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기술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진 의문은 아마도 여러분도 함께 생각하셨을 겁니다. “어지럽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프로그램에서 리듬체조 국가 대표를 했던 한 사람이 나와서 저의 궁금증을 풀어줬습니다. 소위 ‘점찍기’ 기술입니다. 빨리 회전을 하다보면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시선을 어느 한 곳에다 찍어두고 몸을 회전시킨다는 겁니다. 몸이 돌 때까지 그 점을 보다가 몸이 돌면 다시 그 지점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는 훈련을 하면 어지럼증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가올 심판의 때에 대한 노아의 성공과 롯의 아내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아는 무엇에 대해 성공했고, 롯의 아내는 무엇에 대해 실패했을까요? 노아는 그의 평생, 특히 120년간의 방주를 짓는 기간 동안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농사하고 가정을 꾸리고 먹고 자는 모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는 한 가정의 좋은 가장이며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장입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분명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셨고, 그의 삶의 모든 질서는 말씀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롯의 처의 실패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녀가 한 때 구원의 대상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분명한 계시의 말씀을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온 말씀에 집중하지 못했고, 말씀 대로 살지 못했고, 소금기둥이 되어 오늘날 우리들 모두의 ‘경고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그녀를 기억해야 할 이유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 않습니까? 3. 붉은 줄 하나 요즘 페이스북에서 인기 작가로 떠오르는 목사님이 한 분 있습니다. 김관성 목사님이라는 침례교 목사님입니다. 그 분이 그동안 페이스북에서 썼던 글들을 모아서 ‘본질이 이긴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에는 젊은 목회자의 고민과 자기 고백이 함께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한 때 큰 교회, 많은 성도들을 거느린 선후배, 동기 목회자들을 보면서 낙심했었습니다. 은근히 ‘난 왜 이렇게 사나’, ‘나는 왜 이럴까?’라는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을 치료하는 한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존 파이퍼 목사의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을 때’라는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크게 만족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p.19)라는 문장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쌓은 업적과 성공으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성도로 부름 받은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장 큰 은혜로 여기고 그것을 삶으로 표현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제시하는 가치관과 도량형 잣대로 목회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큰 자리로 부름 받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신실하게 감당하고, 작은 자리로 부름 받은 사람은 그 자체로 꿀릴 것 없이 복된 사역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본질은 유지하되 방법론은 다양하게 하면 된다고. 하지만 방법은 반드시 본질에 영향을 줍니다. 분명한 건, 하나님은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울 수 있는 목회자를 찾으신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헌신할 수 있는 분명한 가치를 발견했고, 그 가치에 집중하고 헌신하는 목회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목회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붉은 줄 하나를 창에 매달고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음으로 사모하며 기다리는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리고성 사람들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의 첫 전쟁을 그 성과 함께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붉은 줄을 내리고 그 줄에 집중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입니다. 여기서 기생이라 번역된 것은 아마도 성문에서 유곽을 하면서 먹을 것과 숙소를 제공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라합은 그 지역을 오고가는 사람들로부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잘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과 그 백성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참 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서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녀는 여리고성을 살피러 온 두 정탐꾼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들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중요한 구원의 약속을 얻어냅니다. 붉은 줄을 창밖으로 매달아놓으면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그 집을 보호하겠노라는 약속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그것을 믿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생명을 걸고 보호했고, 그들이 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붉은 줄을 창으로 매달고 구원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라합과 그녀의 가정은 오직 하나, 붉은 줄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4. 기억하라, 오직 믿음이다. 라합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여리고성의 왕이 보낸 군사들이 라합을 심문합니다. 정탐군을 숨기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라합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정탐군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라합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말들이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 아무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 주변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성을 빙글빙글 돌기만 합니다. 하루만 그런 줄 알았더니 이틀, 삼일, 날마다 성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합니다. 무엇인가 가능성이 보여야 믿음이 생기는 법인데,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성 여리고를 함락시킬만한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곱째 날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을 불면서 성을 돕니다. 일곱 바퀴를 돕니다. 여러분이 여리고성 사람들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서로 어떤 말들을 주고 받을까요? 여러분이 라합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든든히 가질 수 있을까요? 붉은 줄에 대한 약속 하나만을 믿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제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성벽이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비명이 들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조금 전까지 이웃이었고 형제였던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나도 여리고 사람이요, 이 성에 있는데 과연 이스라엘 군사들이 나와 가족들을 구원해줄 수 있을까....? 그들이 나를 알아볼까....? 이런 붉은 줄 하나가 나를 살릴 수 있을까....? 성벽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 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 두려움과 분노와 절망의 소리, 소리 소리들.... 만일 우리들이 라합이라면 그 속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지킬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 붉은 줄에 대한 약속에 집중하여 마음을 지키며 삶을 지키며 구원의 때를 기다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라합과 그 가족이 붉은 줄을 내리고 기다리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구원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그들은 왜 붉은 줄에 집중했을까요? 예, 그것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줄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들과 다른 여리고성 사람들을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믿음과 삶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 상징이기 때문이요, 그 줄에서 이방인인 자신들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붉은 줄에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모든 삶의 역량을 집중하여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집중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에 점 찍으셔야 합니다. 이것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없으면 불안하고, 저렇게 해야 살 것 같고, 저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뒤떨어지는 것 같고... 우리의 시선을 유혹하는 세상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귓전을 유혹하는 세상의 소리에 마음을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단순한 것이 이깁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이 이깁니다. 가장 원시적인 것이 이깁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말씀이 이깁니다. 복음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승리합니다. 라합 시대에게 허락하신 붉은 줄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구원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무엇에 집중하셔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무엇에 헌신하고 무엇에 나의 시간과 재능과 재물과 관계를 집중해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절망하고 두려워합니다. 즐기며 노래합니다. 이 길이 살길이다, 저렇게 가야 한다 외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노아의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십니다. 롯의 아내의 어리석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구원을 향한 붉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했던 아름다운 여인 라합을 소개합니다. 그녀는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고,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조상의 계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믿음은 집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양성이 상식이 되는 시대, 우리의 마음과 삶이 오직 예수님께 점 찍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라합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가 초대교회와 함께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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