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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5 하나님의 기쁨-4.헌신, 수면 아래의 삶 na kim 201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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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5.

 

본 문 : 3:13-17

제 목 : 하나님의 기쁨 – 4. 헌신, 수면 아래의 삶

 

지난 해 성일이에게 있었던 가장 큰 일 중 하나는 수영을 배운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수영장에 빠져서 허우적거린 이후에 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많았는데, YMCA에 등록해서 드디어 수영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승하도 함께 배웠지만 아직 잘 하지는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가일이도, 성일이도, 승하도 한번씩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수영을 배워주는 것은 적어도 한번 이상 인생에서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 있는 위기의 상황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수영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제가 어릴 때 수영을 배웠던 방식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식하고 위험했습니다. 여름방학이 되면 저는 거제도에 있는 외가댁으로 갔습니다. 그 지역에서 외할아버지는 장로셨고, 경제적으로, 덕망으로도 꽤 유력한 분이였습니다. 옥장로의 손주에다가 부산에서 왔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물가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저절로 어깨가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다면 바다, 저수지면 저수지에 풍덩풍덩 뛰어들어서 마치 어려서 걸음을 걷듯이 물에서 수영을 했습니다. 제가 수영을 못하고 물을 겁을 내는 것은 그 동네 아이들에게는 정말 부끄럽고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거제도 거제면에는 3-4년마다 꼭 한명씩 물에 빠져 죽는다는 큰 저수지가 있습니다. 꽤 경사가 급한데도 온 동네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저수지를 가로질러 헤엄을 치곤했습니다. 제가 3-4학년 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척 형들이 제게 수영을 배워주겠다고 했습니다. 수영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두려움 마음과 함께 있었지만 일단은 형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형들은 저를 저수지 깊은 곳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그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수면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일단 위로 올라가면 숨을 쉴 수 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아... 이게 죽음이구나...라는 생각을 어린 나이에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죽을 힘, 살 힘을 다해서 팔과 다리를 저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와중에서 저수지 언덕에서 깔깔대며 저를 지켜보는 온 동네 아이들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조롱하는 소리가 들렸다가 가물거렸습니다. 어서 저쪽 편으로 나가고 싶은데 몸은 자꾸 가라앉고 힘은 점점 없어졌습니다. 발끝이 겨우 저수지 경사면에 닿을 때까지 이제 죽겠다...는 생각을 열 번도 더 했던 것 같습니다.

 

한 형이 손을 내 밀어줬습니다. 그 손을 잡고 나오는데 제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과 저수지 물이 범벅이 되었습니다. 엉엉 울면서 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형들이 그러더군요. 수영은 그렇게 배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무식하고도 용감한 수영 교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린 나이에 수면 아래의 세계가 얼마나 제게 혹독하며 가혹하며 수면 위의 세계가 얼마나 제게 은혜인지를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1. 물 속으로 들어가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는 약식으로 머리에 물을 흘러내리게 하는 정도이지만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풀던 세례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의식이었습니다. 요즘 침례교에서 하는 의식보다 좀 더 엄숙하고 의미심장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것은 물 속에 들어갔다가 모든 죄를 씻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의식입니다. 이 세례의식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특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흐르는 강물 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오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세례를 위해 물속에 잠긴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물론 가장 큰 의미는 죄 씻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물에 잠기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영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잠간의 영적인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은 우리의 죄가 씻기는 곳이면서 죄의 형벌이 죽음임을 알려주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물에 잠기십니다. 물 속의 세계를 경험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그리고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덤까지 내려가시는 것과 같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자신이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는 예식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세례는 우리들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죽음이며, 죄를 씻음으로 정결하게 되어 수면 위의 세계 즉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하지만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인류의 죄를 씻기시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시는 것, 우리와 같이 되는 것,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죽음을 경험하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이 의미를 알기에 예수님의 세례 요청을 거절했고, 예수님 또한 이 의미를 아시기에 거듭 허락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시는 분입니다.

 

2. 헌신을 보이시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 오늘은 같은 본문으로 네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마음과 삶의 변화가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했습니다. 두 번째는 참된 겸손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했습니다. 세 번째는 절대 순종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참된 헌신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참된 헌신의 모습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왜 이 헌신을 기뻐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헌신은 자주 구약의 제사의식을 통해서 설명되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쏟고 내장을 제거하고 살은 각을 떠서 제단에 바칩니다. 제물을 살려두는 법은 없습니다. 제물의 죽음이 제사 드리는 성도의 죽음을 대신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참된 헌신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이런 해석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단번에 자신을 헌신하십니다. “...그가....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6)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셔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헌십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이러한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변화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어 해같이 빛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만나서 무엇인가를 의논하십니다. 베드로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 고백하기를 초막 셋을 지어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께 드리고 함께 살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17:5) 왜 하나님은 다시 아들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실 것일까요?

 

그 답은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살펴보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16-17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말씀셨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 오르셔서 십자가를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세례의식 때 아버지의 아픈 사랑과 깊은 기쁨에 대해 표현하셨고,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다시 한번 아픈 사랑과 깊은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참된 헌신을 기뻐하셨습니다.

 

3. 헌신을 명하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은 마 3장에서와는 달리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 그들에게 하는 말, 그들이 들어야 할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마 16장에서 아주 중요한 두가지를 선언하십니다. 첫째는 베드로의 신앙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부정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교회 되려느냐? 나와 같이 헌신하자!”입니다.

 

그리고 6일이 지납니다. 제자들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고, 다시 십자가를 결단하셨고, 하나님은 다시 아픈 사랑과 깊은 기쁨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와서도 거듭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17:22-23)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과 17장을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에서 지금 물속에 계십니까? 물 위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후 단 한 번도 물속을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물 아래로 내려가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셨고, 무덤에 내려가셔서 우리의 모든 형벌과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참된 헌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제자들에게 이 헌신을 명령하셨습니다. 못하겠다, 못한다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헌신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선포하시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과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성도와 교회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너희가 나를 믿는 성도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냐? 그렇다면 물 위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아닌, 물속의 죽음을 경험하는 십자가의 길을 나와 함께 걸어가자.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뒤를 따르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반대하고 안된다고 했을까요? 또 성경은 왜 이런 장면을 기록으로 남겼을까요? 잘 순종하고 잘 따랐더라...가 아니라 제자들은 반대하고 외면하고 도망쳤더라... 왜 성경은 이렇게 교회의 기초를 놓았던 제자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요즘 제자들의 마음이 너무 잘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우리들에게 기록해주신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로 저를 헌신하기로 결단했을 때 저는 수면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웃과 교회를 만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요 그것이 목회자의 삶이라고 진심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부끄럽게도 자꾸만 수면 위로 고개를 들고 싶습니다. 자꾸만 팔 다리가 허우적거려지고 이제 그만...그만...을 외치고 싶습니다. 고백하건데, 나를 위해 헌신하신 우리 주님,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주님은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고개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구하시려는 어리석고도 아름다운 결단을 하시고 단 한 번도 수면 위의 맑은 공기와 편안한 삶을 그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수면 아래의 삶을 결단하시고 나의 죄를 씻는 세례 의식에 동참하시면서 선택하신 그 아름다운 헌신의 결단.... 단 한번도 후회 없었고 변함없었고 흔들림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를 위해 참된 헌신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헌신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참 쉽지가 않습니다. 물 아래, 죽음으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만, 그 사랑과 헌신을 믿지만 내가 그 뒤를 따르는 일이 쉽지가 않음을 더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나를 향해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우리들 앞에서 셰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셔서 물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단 한번도 뒷걸음 치지 않으시고, 수면 위로 고개 내밀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손 내미십니다. 물 아래의 세계, 구원 받은 성도만이 걸어갈 수 있는 십자가의 길, 참된 헌신의 길을 함께 가자 말씀하십니다. 그 삶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는 헌신이 있습니다. 나의 만족과 자랑을 위한 모든 헌신, 비교하고 질투하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다른 영광을 찾는 헌신이 있습니다. 그 모든 왜곡된 헌신을 오늘 우리를 위해 물 밑으로 고개 숙이시는 주님 앞에서 흘려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 물 밑의 길을 걸어가는 참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헌신을 보며 너는 나의 참 사랑하는 아들, 나의 기쁨이 되는 딸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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