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ing Day – 4. ‘마음맹(盲)’ | na kim | 2014-1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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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imeo.com/chodaepa/2014-10-05 2014. 10. 5.
* 본 문 : 빌립보서 2장 1-5절 말씀 * 제 목 : Blessing Day – 4. ‘마음맹(盲)’ 여러분 혹시 ‘마음맹(盲)’이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이 말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쓰기도 하더군요. ‘마음맹’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기분, 정서를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눈치가 없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 기분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대화와 소통이 자기중심적으로 되기 쉽고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우리 안에 조금씩 있는 증상이기도 합니다. 가끔 제게 강력하게 불만을 토로하시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상담하시는 목사님이 그것도 몰라요!” 자신들의 기분이나 마음을 잘 알아주지 못했다는 원망입니다. 상담과 목회를 한다는 제게도 이런 증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에게서 조금 더 많이 나타나고, 사교형이나 안정형보다는 주도형이나 신중형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가 조금 지나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도움을 청한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증상이 너무 심각해서 도움을 청한다고 했습니다. 그 남편의 증상은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 싸움을 하다가 아내가 너무 답답합니다. 도대체 말이 안통합니다. 짜증나고 화가 나서 웁니다. 그때 남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왜 울고 있는 거야? 난 니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 우는 이유를 설명해줘 봐.... 도대체 몇 %나 화가 난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우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해? 아... 답답해! 빨리 우는 이유를 설명해야 달래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아, 됐어 울든지 말든지.... 시끄러워 그만 좀 울 수 없어?" 남편은 아내의 감정적인 반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남편이 아내의 감정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마음맹’으로 부릅니다.
호주의 소아과 의사였던 한스 아스퍼거는 1944년 한 아이를 치료하는 중에 행동과 반응의 일정한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공감의 능력이 부족하여 친구 관계를 맺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고, 대화를 일방적으로 진행하며, 특별한 분야에 대해 강하게 몰두하는 성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학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이런 증상을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합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리고 의외로 우리들 가까이에 많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에 한 사람인 토마스 제퍼슨(사진 1)도 이 증후군에 속했다고 알려져 있고, 아인쉬타인(사진2)도 그러하며, 전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빌 게이츠 또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보신 영화 중에서도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던 주인공이 많습니다. ‘레인맨’(사진3)이 그렇고, ‘모차르트와 고래’(사진4), ‘내 이름은 칸’(사진5)이라는 영화도 그렇습니다.
1. 내 마음이 들리시나요?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또 다른 영화 한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목이 ‘아담’(사진6)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 이야기를 잠시 해드릴까요?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소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주인공 아담은 완구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유치원 교사이면서 동화작가인 아름다운 베스라는 여인이 윗 층으로 이사를 옵니다. 베스는 아스퍼거 증후군, 즉 다른 사람의 정서적 반응을 읽는 능력이 없는 아담과 반대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여성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담에게서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아담의 말과 행동은 때로 베스를 당황하게 하고, 때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베스를 무안하게 합니다. 특히 외동딸 베스를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이 잘 통하지 않으니 사랑을 나누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결국 아담은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던 천체 연구소로 직장을 옮기기 위해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가야하는데, 베스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따라가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혼자 가는 것이 너무 두려운 아담은 밤이 새도록 몸을 떨면서 고민하다가 결국 다음 날 아침 혼자서 캘리포니아로 떠납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그대로 끝날까요?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만일 여러분들이 이 영화 속에 들어간다면,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돕는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2. 마음에는 문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이미지화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을 농부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든지, 자라나는 겨자씨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그런 맥락입니다. 또 여러분과 생각하고 싶은 이미지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이 사진을 많이 보셨을텐데요,(사진 7), 어떤 말씀일까요? 예, 요한계시록 3:20의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 3:20) 이렇게 성경은 우리들의 마음에는 문이 있고 예수님께서 그 문을 두드리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하나의 문에 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이미지는 예수님의 또 다른 선언인 “나는 선한 목자라”라는 말씀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합니다. 유목을 하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목초지를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들판에서 유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자는 지형물을 이용해서 대충 양들이 도망가거나 헤매지 않을 정도의 우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양들을 그 우리 안으로 모읍니다. 양들이 다 모이고 나면 양치기 개들은 임시우리 주변에서 양들을 지키지만 정작 목자는 양들이 들어왔던 출입구에 눕습니다. 그 자신이 양들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들판의 다른 짐승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양들에게는 열린 문이 되어 그들을 들어오게 하고 보호하지만 들짐승들에게는 견고한 벽이 되어 양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 만드신 ‘열린 문’은 양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며, 양들의 밤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 되며, 어두운 밤에 양들을 지키는 생명이 됩니다. 3. 두 가지 문 여러분! 성경이 보여주는 문에 대한 이 두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계시록 3:20에 그려진 문은 ‘닫힌 문’입니다. 그 문은 예수님을 향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의 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닫혀 있습니다. 그 마음은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순종하기를 거절합니다. 말씀을 듣기는 해도 실천하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믿기는 한데 믿음의 능력은 없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마음의 문이 있으되, 닫혀 있습니다. 여러분, 닫힌 문은 마치 무엇과 같다고 했습니까? 예, 벽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벽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 10:7에는 어떤 문이 그려지고 있습니까? ‘열린 문’입니다. 그 문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독생하신 아들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 대해 열린 문이 되십니다.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를 찾아 광야를 헤매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 양들 중에는 좀 못된 양들도 있습니다. 좀 못난 양들도 있습니다. 다쳐서 절뚝이는 양들도 있고, 마음을 다쳐서 삐진 양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두운 밤이 찾아옵니다. 낮에는 선한 목자가 되어 그들을 인도하셨던 주님은 밤에는 그들의 문이 되십니다. 못된 양, 못난 양, 아픈 양, 삐진 양... 그리고 착하고 예쁜 양... 그 어떤 양도 차별 없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양들의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됩니다. 저는 원고를 쓰면서 이 말을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예수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 우리를 향해 열린 생명의 문”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마음의 문과 하나님의 마음의 문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예, 분명합니다. 하나는 닫힌 문이요, 다른 하나는 열린 문입니다. 닫힌 문은 어떤 문입니까? 교회이며 성도인데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문을 열지 않습니다. 견고한 자기 방어의 벽을 높이 세우고 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교만한 문입니다. 열린 문은 어떤 문입니까?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신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되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했습니다. 그 문은 문턱이 너무 낮아서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너무 나고 겸손해서 모두가 밟고 지나가는 문입니다. 밟고 또 밟아서 어느새 길이 되어버린 문, 예수 그리스도 - 우리들의 생명의 문입니다. 4. 서로에게 열린 교회 영화 아담에서, 아담과 베스는 다시 사랑을 하게 될까요? 아니면 헤어져서 비극적으로 끝날까요? 그들은 헤어져 있으면서 서로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만나면 다시 고통스러운 현실이 반복될 것입니다. 아담은 여전히 베스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할 것이고, 베스는 그것으로 인해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십니까? 아담은 새로운 직장을 다니면서 자신의 문제에 도전합니다. 문제를 진즉에 깨닫고 고치려고 노력했다면 사랑하는 베스를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들과 교통하려고 애씁니다. 이전에는 숨으려고만 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서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느끼고 배려하려고 합니다. 본능으로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학습과 노력을 통해 느끼려고 애쓰고 또 애씁니다. 그러던 중 베스로부터 소포가 하나 도착합니다. 베스는 헤어져 있는 동안 아담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그림 동화를 썼고, 동화집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보낸 것입니다. 헤어져 있는 동안 베스 또한 아담의 연약한 점을 이해하고 그대로 받기로 했습니다. 아담의 연약한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다시 사랑하기로 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기로 한 것입니다. 아담은 그림 동화집과 편지 한 장를 통해서 베스의 마음과 사랑을 느낍니다. 음악이 흐르고 하늘에 별이 쏟아지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마음에도 문이 있습니까? 그 문은 어떤 문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닫힌 문입니까? 예수님처럼 열린 문입니까? 그 문은 어느 방향으로 열려 있고, 어느 방향으로 닫혀 있습니까? 그 문은 문턱이 너무 높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기에 너무 좁게 열어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상처받을까봐, 혹시 부끄러움이 드러날까 출입구를 10중 자물쇠로 꽁꽁 채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마음맹(盲)’이라고 붙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맹이라고 했습니까? 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읽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마음이 마음맹일까요? 교회되고 성도되었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마음맹입니다. 높은 마음, 교만한 마음이 마음맹입니다. 차가운 마음, 냉정한 마음이 마음맹입니다. 판단하는 마음, 정죄하는 마음이 마음맹입니다. 무관심하고 무신경한 것이 마음맹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권면에 대해 아멘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을 품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해 열린 문을 가지게 될까요? 닫힌 문을 가지게 될까요? 우리들 서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까요? 열릴까요? 닫힐까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지역사회와 시대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될까요? 닫힌 마음을 가지게 될까요? 본문 1절을 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은....”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2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했습니다. 요약하면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입니다.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핵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겸손하고 낮은 마음’입니다. 4절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고 헌신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만으로는 안됩니다. 누구의 마음을 품어야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예, 그래서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우리들에 대해 활짝 열어두신 구원의 문이 있고, 우리가 그 마음을 품을 때 하나님에 대해, 교회와 성도에 대해, 지역 사회와 시대에 대해 열린 마음과 삶으로 교통하고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마음맹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벽을 만들고 단절시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맹이라는 영적 질병을 이기고, 서로에게 길이 되며 서로에게 열린 문이 되며 서로에게 생명이 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같은 마음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낮고 겸손한 마음, 나누고 섬기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임재하시고 하늘의 열린 문이 되셔서 우리로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과 교통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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