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ing Day- 5. 복된 인생 | na kim | 2014-1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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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imeo.com/chodaepa/2014-10-12 본 문 : 누가복음 11장 27-28절 말씀 제 목 : Blessing Day – 5. 복된 인생 이번 토요일에 Blessing Day 팀이 준비한 Movie Night이 교회당에서 있지요? 저도 영화를 좋아해서 혼자서 몰입해서 보는 걸 좋아합니다. 제가 재미있게 본 영화 중에 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잭 니콜슨이 주연했고, 2003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딱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입니다. 평생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66세가 되어 정년퇴직을 한 Schmidt는 마치 삶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갑자가 아내가 죽습니다. 딸은 결혼을 합니다. 너무 혼란스러웠던 그는 자신의 마음을 6살된 탄자니아에 있는 소년 엔두구에게 편지로 털어놓습니다. 엔두구는 그가 한달에 22불씩 후원하고 있는 어린이였습니다. “엔두구에게... 나도 어렸을 때는 내가 아주 특별한 줄 알았단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당연한 운명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제 돌아보니 이 세상이 달라지는데 무슨 일을 했을까? 이 세상이 나 때문에 좋아진 것은 무엇일까? 내 인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을까?” 자기반성과 회한으로 가득 찬 슈미트의 편지를 받은 엔두구는 답장과 함께 그림 한 장을 보냅니다. “저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림1) 하루 77센트의 도움을 받는 탄자니아의 6살짜리 소년 엔두구,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에서 유복한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슈미트, 그들은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예, 그렇다고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 오늘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쯤 슈미트가 엔두구에게 고백하는 것과 같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나는 복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과연 본 받을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만날 때 칭찬받을 만 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가치 지향의 삶 현대 미국 선교사에서 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면 ‘짐 엘리엇’입니다. 그와 네 명의 친구는 에콰도르 아마존 정글에 사는 와오다니족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했습니다. 이 부족은 다른 부족과의 빈번한 갈등과 폭력적인 성향으로 거의 멸종위기에 있었고, 문명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이 부족을 선교하기 위해 아마존 지역에 정착합니다. 하지만 그들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제대로 선교를 해보지도 못한 채 와오다니족의 전사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1956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후 약 3년이 지납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와 그의 딸 발레리, 순교한 또 다른 선교사였던 네이트 세인트의 누이 레이첼, 이 세 사람이 선교사 자격으로 와오다니 족을 다시 찾습니다. 그들은 남편이자 아버지,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소망했고, 원수와 다름없는 와오다니족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약 20년이 지납니다. 세인트 선교사의 누이였던 레이첼이 소천합니다. 세인트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스티브는 고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와오다니 부족을 다시 찾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왜 이런 곳에서 순교를 당해야 했으며, 고모는 왜 이런 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하는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는 선교사들을 직접 창으로 찔러 죽였던 민카야니였습니다. 그는 스티브를 데리고 다섯 선교사가 죽임 당했던 강변으로 갑니다. 그리고 스티브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곳에서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 그는 스티브의 손에 창을 쥐어줍니다. 그리고 창의 끝을 자신의 가슴팍에 댑니다. 자신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와오다니족의 방식입니다. 아들은 반드시 아버지의 피의 복수를 해야 했습니다. 아니면 아버지와 같은 죽음을 또 당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스티브는 비로소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들이 죽었던 이유를 깨닫습니다. 그는 창을 내리고 민카야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죽임당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신 부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었을 뿐입니다.” 이후 스티브 또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와오다니 족과 함께 삽니다. 이전에 와오다니족은 복수가 상식이며 전쟁이 생활일 정도로 호전적인 부족이어서 남성이 할아버지가 되기까지 살아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민카야니는 와오다니족 유일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고,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을 ‘End of the Spear’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End’라는 말은 중의적입니다. 먼저는 창의 끝, 즉 사람을 죽이는 창의 끝을 말합니다. 창의 끝에 찔러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서로를 죽이고 죽는 복수의 사슬이 끝났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끝, 복수의 끝, 죄와 악의 사슬에 얽매인 삶의 끝 - 그 끝은 다섯 사람의 죽음과 함께 와오다니족에게 찾아왔고, 그 끝은 와오다니족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섯 선교사의 죽음은 한 부족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첫 발걸음이 됩니다. 그들의 죽음은 와오다니족에게 거룩하고 복된 삶을 살아야 하는 아름다운 의무를 주었습니다. 와오다니족은 창을 버리고 성경을 택했고, 그렇게 한 부족이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짐 엘리엇이 일기 중에 남긴 말이 하나 있습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 가치를 얻으면 그는 복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생명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의 가슴 속에 불타던 가치가 와오다니 모든 부족 구성원들의 가슴 속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모든 사람에게 복되고 가치있는 삶으로 들어가는 길이 된 것입니다. 2.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0장은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서 70인을 선발하여 갈릴리 주변 마을들로 파송합니다. 그들이 두루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은 귀신들까지도 자신들에게 항복했다며 흥분합니다.(눅 10:17) 예수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다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기쁨의 이유가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 예수님은 지금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복일까요? 인생이 참된 가치를 발견하는 복입니다. 24절에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24)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참으로 복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압니다.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부귀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며 사는데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말씀 다음에 10:25-37, 10:38-42의 두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생을 구하는 율법사 이야기, 또 하나는 늘 바쁜 마르다 이야기입니다. 율법사와 마르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었지만 그들은 아직 참된 가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빠질 것이 없는 율법사나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마르다조차도 아직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구든지 제자들처럼 참된 가치를 보고 듣고 알게 된 사람들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된 인생은 부귀와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나도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10장에 이어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의 복음을 계속 전하시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감동을 받은 여인은 소리 높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눅 11:27)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좋았으면 이렇게 외쳤을까요? 아마도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이 여인은 내 아들도 저렇게 탁월했으면...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가장 좋은 칭찬이 어머니를 칭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당신 어머니는 전생에 무슨 나라를 구하셨나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좋은 아들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부러움에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여인의 말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이미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참된 복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보고 듣는 것입니다. 참된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아무나 이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권력자도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이 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선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복음을 받고 믿는 사람은 복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된 삶의 원리는 열려 있습니까? 닫혀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다만 복음에 귀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나타나서 “당신 어머니는 정말 복이 많은 여인이군요. 당신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에 의하면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또 누가 복이 있을까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이 여인의 말은 예수님을 축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복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복된 삶으로 초청하고 있는데, 이 여인은 마치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를 축복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은 예수님을 아주 가르침이 뛰어난 한 사람 정도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좋은 아들을 둔 어머니로 제한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11:28) 예수님의 말씀의 맥락을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인아, 아니다. 나를 낳은 나의 어머니에게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제자들도 복된 사람이 될 수 있고, 너도 복된 사람이 될 수 있고, 무리들도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복음을 믿음으로 받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된 삶을 활짝 문을 열고 있다.” 4. 예수님의 형제, 자매가 되어 예수님은 이미 이 보다 더 과격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 8:19-21에 보면 예수님이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가족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막 3:31-35의 말씀을 봅시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1-35)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오랜 만에 아들을, 형님을 만나러 왔더니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냐!”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말씀을 누가복음 11장 28절의 말씀과 연결시켜 보십시오. 27절에서 여인은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복된 삶은 예수님과 같이 훌륭한 사람을 낳은 어머니에게 제한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눅 8:19-21과 막 3:31-35에 의하면 바로 주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기 때문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 말씀은 참으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 당신의 혈육들 앞에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과 피를 나눈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어 하늘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뜻, 가치 중심의 삶을 살면 됩니다. 욕심으로도, 근심으로도, 성품으로도, 상식으로도 살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이땅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가장 가치있고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자매가 되어서 말입니다. 어제 저녁에 문득 홍재성 집사님과 홍춘식 권사님 생각이 나서 심방을 갔었습니다.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지난 번 홍재성 집사님이 커네티컷 대학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저 혼자 심방을 간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홍 집사님이 제게 띄엄띄엄 해주신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제까지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건강을 회복해 주시면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습니다. 양로원 방문도 하고, 다른 사람도 돕고... 새생명을 주셨으니 남은 인생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가장 복되게 살고 싶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제 가서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다보니 그때는 진통제에 취해서 제가 심방을 했던 기억조차 잊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리마인드시켜드렸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는 평생을 섬기고 헌신해야 할 정말 중요한 가치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고백을 다 함께 읽으면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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