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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ssing Day-7. 두 가지 시선 na kim 201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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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http://vimeo.com/chodaepa/2014-11-02

 

본 문 : 요한복음 91-3절 말씀

제 목 : Blessing Day 7. 두 가지 시선

 

저는 올해 시카고에서 열린 교단 총회에 직접 차를 몰고 갔습니다. 아시는 대로 필라델피아에서 시카고까지 약 800마일의 거리입니다. 가는 길은 오하이오에 있는 김청자 권사님을 방문하느라고 조금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운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어서 그리 힘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함께 동행했던 나경집 목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는 길이었습니다. 80번 하이웨이를 타고 인디애나를 지나는 길에 단풍이 아름답게 진 숲들이 보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특히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이 곧게 뻗어서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참 좋아합니다. 겨울에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어도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 같고, 봄에 마른 가지마다 새싹이 돋으면 그것도 서로 자랑하는 것 같아서 예쁘고, 여름에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로 반짝이는 하늘을 보여주는 것도 좋고, 특히 가을에 붉게 물든 단풍잎을 하나씩 떨어뜨리면서 마른 가지들을 서로 만져주는 모습도 참 좋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목사님께 드리면서, “저기 숲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나목사님은 심드렁하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 이 목사... 저 숲 속에 들어가 봤나?” “아니요... 제가 저 숲에 어떻게 들어가요?” 그랬더니 나목사님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나는 말이야, 요즘 골프를 치다가 공이 숲으로 들어가면 공을 찾으러 들어가기가 싫어. 낙엽 때문에 찾기도 어렵고, 요즘은 또 그렇게 숲에 가시가 많아.... 나는 저런 숲이 딱 싫어.”

 

제가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던 시절, 삼천포라는 바다가 있는 작은 도시에서 청년 대학부 사역을 했습니다. 청년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놀다가 새벽이 되면 등대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야간 조업을 하고 삼천포 항으로 들어오는 배들을 위한 등대였습니다. 바다 저 멀리 먼동이 뿌옇게 틀 때면, 통통통... 소리를 내면서 크고 작은 배들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자랐지만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제게는 마치 예쁜 그림 엽서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날도 청년들을 데리고 새벽 동트는 모습을 보겠다고 등대로 갔습니다. 배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 정말 좋다.... 저기 저 배들 좀 봐.... 진짜 낭만적이네.... 정말 멋있네...” 등대 끝에 나란히 앉아서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감탄을 표현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낮고 시니컬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낭만은 무슨.... 밤새도록 고기 잡아봤나...?

 

가끔 교회를 나오는 형제였습니다. 아버지가 근해에서 고기배를 타신다고 했습니다. 그 형제가 제게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저 사람들.... 밤 새도록 목숨 걸고 어두운 바다와 싸우면서 고기 잡고 들어오는 사람들이예요. 저 사람들한테 낭만...없어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고, 갈매기도 날고 있었고, 통통배와 파도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습니다.

 

1. 문제 혹은 사람?

 

제가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 한 분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체육을 담당하셨던 김태환 선생님입니다. 원래 사회학을 전공하셨지만 체육을 좋아하셔서 체육과목을 가르치는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별명을 우대라고 붙일 만큼 가슴과 팔 근육이 너무 발달해서 항상 팔을 좌우로 벌리고 걸어 다니시는 분이었습니다.

 

2때 저희 반 교실은 건물 중앙 조례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례대를 청소하는 일이 저희 반의 몫이었습니다. 청소 시간에 7-8명 정도가 나가서 쓸고 정리하면 됐습니다. 하루는 저와 친구들이 청소를 하러 나가서 장난을 쳤습니다. 한참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통수를 !’ 하고 때렸습니다. “누구얏!”하고 돌아보니 험악한 표정의 우대선생님이었습니다. “이노무 자식이...”하시더니 막무가내로 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갑자기 발생한 일이라 당황하기도 했고, 뭐 그런 일로 이렇게 사람을 때리나...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팔로 선생님의 구타를 막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를 외치면서 뒷걸음을 치면서 피했습니다. 덩치는 컸지만 빠르지 못했던 선생님은 조례대를 돌면서 저를 때리려고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점점 모이고 선생님은 점점 지치셨습니다. “너 이름이 뭐야? 2학년 3, 이응도...? 너 오늘 수업 마치고 학생주임실로 왓!”

 

여러분, 혹시 학교 다니시면서 학생주임실로 끌어가보셨습니까? 거의 죽어서 나오는 곳입니다. 도망갈 곳도 없고, 또 여러 선생님이 계셔서 막을 수도 없고... ... 이제 죽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몇 대 맞을걸...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선생님이라는 분이 학생을 그 정도의 일로 그렇게 때리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학교를 그만 둘까...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날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방과 후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학생 주임실로 갔습니다. 학생부 선생님이 여러분 계실 줄로 알았는데, 의외로 김태환 선생님 한 분만 계셨습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의자를 권하셨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았습니다. “이응도, 니 아까 많이 아팠제? 괜찮나?” 뜻밖의 말씀이셨습니다. “괜찮슴미더.... 별로 안맞았심미더.”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이노무 자슥.....”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그 담임 선생님한테 오늘 니를 반쯤 직이놓겠다고 허락을 받으러 갔다아이가.... 니 담임이 이차환 선생님이제..?” “....” “그런데 니 착한 놈이라 카데... 생활 기록부 보니까 말썽 피운 적도 엄꼬... 성적도 좋고.... 니 아부지가 목사님이고 니는 기독교 학생회 회장이라매? 나도 요새 교회 댕긴다.... 내가 별거 아닌 일에 너무 심하게 화를 내서 미안하다....” 선생님은 저의 어깨를 툭툭 쳐 주셨습니다. 아마도 저희 학교 역사에 학생주임실로 끌려가서 선생님과 웃으면서 나온 학생은 제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문제적 사람, 사람의 문제

 

생각해보면 김태환 선생님은 좀 급한 성격을 가진 분이셨지만 또 참 좋은 성품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물론 저에 대한 첫인상은 정말 안좋았을 겁니다. 감히 조례대에서 껑충껑충 장난을 치고 있었으니 정말 문제가 많은 학생이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히도 큰 벌과 책망을 하시기 전에 제가 누구인지 알아보셨습니다. 대단한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저의 담임 선생님과 저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저를 다시 파악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통해서 저를 보신 것이 아니라 저를 통해서 문제를 보셨습니다. 그랬더니 화를 낼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많이 격려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문제를 통해서 한 사람을 해석하신 일은 없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의 모든 행동, 삶의 모습이 다 문제로 보이지 않던가요? 사람이나 사물, 현상이나 관계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하지만 사람이 가진 문제는 그 사람의 삶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한 때 사람이 만드는 문제 또한 그 때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모든 문제보다 훨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오늘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한 사람은 맹인입니다. 그는 아마도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 입니까?” 제자들은 시각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사람인데 앞을 못보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맹인인 사람으로 그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신학적 해석을 덧붙입니다. 나면서부터 문제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문제를 통해서 그를 보고 있고, 신학적 입장을 통해서 그의 인생을 해석합니다. 그는 죄로 말미암아 맹인이 된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김태환 선생님께 처음 발견되던 상황이 그랬습니다. 청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서시는 중앙 조례대에서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는 녀석이었고, 선생님의 지도에 말대꾸를 하는 건방진 녀석이었습니다. 만일 그 선생님이 자신이 분명히 경험한 그 일을 통해서 저를 판단하셨다면, 아마 그날 학생 주임실에서 걸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고등학교 중퇴... 뭐 이럴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도 그 선생님은 저를 다시 평가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문제적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이 저를 발견하신 바로 그 때 실수했던 학생으로 저를 보시게 된 겁니다. 그럴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목적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이 사람이 죄인으로만 보이느냐? 내 눈에는 그렇지 않다. 그는 비록 불행하게 나면서부터 맹인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실 것이다.”(9:3) 제자들은 맹인의 삶에 있는 문제를 보고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유대주의 신학으로 해석했지만,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맹인되었던 한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작은 숲 하나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아름답기도 하고, 가시가 무성해서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통통배가 들어오는 부둣가에 새벽 등불을 비추는 등대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낭만적이기도 하고 피곤에 절어 벗어나고 싶은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한 학생의 문제 행동을 발견한 선생님의 지혜는 그 학생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만난 한 맹인의 삶은 어찌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나면서부터 부모의 한숨이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근원을 설명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품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왜 나는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게 되었을까? 나는 내 의지로 아무 잘못한 것이 없고, 내 부모 역시 나에 대해 그 어떤 악한 의도를 품지 않았는데, 왜 나는 평생을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과연 저들이 말하는 대로, 나의 죄나 혹은 내 부모의 죄 때문에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는 벗어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생각의 바퀴를 굴리면서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새로운 관점의 인생이 열렸습니다. 죄가 아닙니다.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 때문도 아니요, 그 자신 때문도 아닙니다. 그의 연약함, 그의 수치, 그의 고통, 그의 눈물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스러운 인생도 하나님의 뜻이 임하면 수치와 눈물이 아닌 기쁨과 영광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다 같이 읽으실까요?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1-3)

 

여러분! 이 짧은 세 구절의 말씀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과 그가 만난 불행에 대해 이렇게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 믿기십니까? 유대인들과 제자들에 의하면 그는 이미 심판을 받아버렸습니다. 죄의 결과가 그 삶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가장 연약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흔적을 통해서 증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목적있는 인생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4. 그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위해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여러분을 봐주면 좋겠습니까? 나의 가장 연약했던 모습, 나의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 나의 가장 아프고 눈물 나는 순간, 나의 가장 부족한 모습, 나의 삶에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기억되고 해석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문제가 나를 해석하고 고통이 나를 설명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다른 성도를, 이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십니까? 그의 부족했던 한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옛날에 저 사람 말이야.... 그의 어려웠던 한 때를 통해서 오늘의 그를 바라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의 삶에 있는 치명적인 아픔을 통해서 그 사람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성경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우리들을 향한 시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따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목적이 열매를 맺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문제적인 인생이 아니라, 눈물의 인생이 아니라, 고통과 수치의 인생이 아니라... 때로 문제가 있어도, 눈물이 있고, 고통과 수치가 있어도 그 모든 연약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역사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 우리의 눈물과 한숨까지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되었다면,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되었다면.... 좀 당당해지셔도 됩니다. 우리의 연약한 과거가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오늘이 우리의 내일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비록 나면서 맹인되었고, 사람들은 나의 죄 혹은 부모의 죄를 논하지만.... 내가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기만 하면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증거하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하나님이 나의 눈물을 쓰시고 하나님이 나의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큰 믿음과 자부심을 마음에 품읍시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겸손하게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세상 가운데 증거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시선, 서로에게 복이 되는 시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된 삶의 열매를 거두시는 교회와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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