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ing Day- 9. 빈 의자 | na kim | 2014-12-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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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imeo.com/chodaepa/11-23-2014
2014. 11. 23. 본 문 : 마태복음 26장 36-38절 말씀 제 목 : 빈 의자 지난 수요일 오전, 신문 칼럼 원고를 보내지 못해서 독촉 전화를 받았습니다. 조용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저희 동네 Ambler 시내에 있는 카페로 갔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한 가족이 이국적인 분위기로 꾸며놓은 카페입니다. 커피가 맛이 있어서 가끔 갑니다. 이탈리아어를 들을 수 있고, 그곳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넓은 유리창으로 따뜻한 햇볕이 들어왔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창을 마주보며 앉았습니다.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거리에 차들이 미끄러지듯 지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빠른 걸음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미 잎을 다 떨군 가로수들이 앙상한 가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유리창에 앉은 먼지들이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건너편에 있는 예쁜 벤치였습니다. 저는 여행을 할 때마다 찍는 사진이 있습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벤치입니다. 세상 어느 곳을 가든지 반드시 있습니다. 제대로 모양을 갖춘 것도 있고, 그저 통나무나 바위를 놓아둔 것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걷고 달리던 사람들이 잠시 지친 다리와 거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벤치를 그 누군가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벤치 사진을 찍을 때마다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마 늦은 40대 쯤 되어야 기억하는 노래일 겁니다. 장재남이라는 가수의 ‘빈 의자’라는 노래입니다. 저는 예쁜 혹은 독특한 벤치를 발견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라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서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 제가 어려서부터 이 노래를 좋아하고 또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세상을 향한 메시지와 이 노래가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어린 마음에 노래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느낀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익명의 수많은 타자들에 대해 내 삶을 드려서 ‘비어있는 자리’가 되겠다는 결단은 단순한 낭만적인 결단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는 생명을 내려놓는 결단이며 때로는 고통을 감수하는 결단이며 때로는 인생에 약속된 모든 즐거움과 영광을 포기하는 결단입니다. 창 밖, 험한 인생의 길을 걷는 익명의 이웃들에게 헌신된 차가운 벤치를 보면서 저는 다시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기분 좋은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벤치에 앉다. 한참 벤치를 보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여러분께 전한 내용의 글을 쓰고 있었는데, 워커에 의지해서 걸어가던 한 할머니가 벤치 앞에 멈춰서더니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요? 바로 일어섰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짐작할 수 있으시죠? 추운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걷다가 잠시 지친 다리를 쉬겠다고 앉았는데 앉은 자리가 너무 차가웠던 것입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다시 피곤한 길을 걸어가는 할머니를 보면서 아...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인생의 길을 걷다가 지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벤치가 쉴 만 하지가 못한 것입니다. 겨울 칼바람에 너무 차가워진 것입니다. 쉬고 싶은 사람이 그 찬 기운을 이기지 못해 쉼을 포기하고 다시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거리에 놓인 그 벤치가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 그 벤치를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준비된 벤치도 때로는 다른 사람의 온기로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역할은 마치 벤치와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또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도 마치 벤치와 같을 수 있습니다. 성도와 성도가 서로에 대해서 감당해야 할 역할도 이와 비슷합니다. 서로의 인생길에 지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서로에게 기대어 쉴 수 있는 하나님이 허락한 은혜와 복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로 한 여름 뜨거운 햇볕이 벤치가 너무 뜨겁게 데워져 있을 수 있고, 겨울 차가운 칼바람에 벤치가 너무 차가워져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랜 풍상에 벤치의 표면이 거칠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친 발걸음 쉬고 싶어서 앉았다가 오히려 다른 아픔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2. 함께 기도하라.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제자들을 필요로 하셨을까? 나아가서 예수님은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일에 필요로 하실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십자가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뜻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환호만 기억합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는 일의 의미도 깨닫지 못합니다. 다만 대단한 권세를 가진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심판의 날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셔도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유월절을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도,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고 먹여도 제자들은 무감각합니다. 오히려 누가 더 높고 큰 사람인지 논쟁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 예언하십니다. 제자들은 서로 자신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한 제자는 목숨 걸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모든 제자들이 함께 같은 목소리로 합창을 합니다. 과연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필요할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마 26:34-35절에서 베드로에 대한 예언,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을 마치시고 곧 36절에서 그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십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했습니다. 38절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표현하시기를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마음의 피곤함과 고통에 이미 충분히 지쳐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던 주님이 이제 죽을 만큼 지치신 것입니다. 죄와 악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길을 걷는 인류를 바라보며,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영원한 의자가 되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신데, 그만 피곤에 젖어 있습니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을 만큼 고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두 제자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영혼을 가장 피곤하게 했을 그들이지만, 가장 큰 실망을 안겨주었을 그들이지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그들이지만,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할 그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곁에 두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위해, 그들 자신을 위해 함께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필요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오르셨고, 끊임없이 자고 조는 그들을 깨우셔서 거듭 기도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기를 원하셨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고, 함께 십자가의 길에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 그들의 온기를 필요로 하는 벤치였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온기가 없다고 해서 벤치가 아닌 것 아니요,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자신의 피곤한 마음을 그들과 나누기를 원하셨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고, 그 자리에 그들이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머무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온기를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3. 감사를 발견하다.
제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처음 상담 사역을 시작할 때가 있었습니다. 필라 장로회에서 청소년 상담소를 개설하고 제게 상담을 부탁했습니다. Cheltenham Ave에 있던 상담소에 매일 나가서 하루 종일 전화를, 혹은 방문을 기다렸습니다. 처음 세달 동안 단 한 사람도 상담소를 찾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참 무능하고 한심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상담 사역을 하던 첫 1년 동안 저를 찾았던 모든 분들을 다 기억합니다. 이름과 사연과 상담 내용들까지 말입니다. 몇 분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분명한 이유는 저를 의지해 준 그분들이 고마워서입니다. 한 분, 한 분이 당시 제게는 너무 소중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밀려드는 상담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서 이제...그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올 것 같을 때에 저는 그때를 생각했었습니다. 아무리 내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하고, 아무라 일하고 싶어도 아무도 찾아주지 않던 시절...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웠던지를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에 상담 했던 기록들을 뒤적여보니 사연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마음과 삶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감사가 사라진 사역은 다시 점검하고 정비해야 할 사역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14년의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 감사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면서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 어떤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지난 주간, 그 카페에서 벤치를 보고 난 다음 저는 제 모습이 자꾸 벤치와 겹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마치 겨울 찬 바람 부는 거리에 놓인 그 철제 벤치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받은 사명은 있어서 벤치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추운 칼바람에 표면이 얼어붙어서 지친 나그네들이 앉을 수 없고, 풍상에 거칠어져서 어쩌다 앉는 나그네들이 긁히고 다치는 벤치 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이 앉지 않을 것 같은, 앉을 수 없는, 필요 없을 것 같이 낡고 차가운 벤치 말입니다. 그런데 2014년을 돌아보니 제게 참으로 큰 두 가지 감사의 제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그 초라한 벤치에 2014년 한 해도 성도 여러분들이 앉아 주셨습니다. 그 벤치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표면이 거칠다고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묵묵히 앉아주셨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체온으로 온기를 나눠주셨고, 오히려 거친 표면을 감싸서 부드럽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추수 감사주일에 좀 색다르고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많이 지치고 힘들고, 많은 부분에서 저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를 주님은 필요로 하실까...? 이런 내가 교회에 과연 필요한가....? 나 같은 목사도 이 성도들에게 필요한가? 저는 이번 한 주간, 여러 번 그 벤치 앞을 서성이며 앉아보며 찍어온 사진을 보며...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2014년 추수 감사절에 제가 드리는 감사의 초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위해 사용하시는 아주 작은 도구로 쓰임 받고 있음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용될 수 있도록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좋은 성도들과 교회를 허락하셔서 추운 칼바람에 제게 온기를 나눠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나그네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벤치, 낡고 초라한 벤치를 오히려 지친 나그네들의 온기로 .따뜻하게 도와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또 하나 감사드리는 것은 2014년 한 해도 주님은 저를 겟세마네 동산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따뜻한 온기가 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기 위해 기도로 마음과 삶을 준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연약한 모습을 통해서 저를 발견하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 가운데 나를 부르시는 음성 가운데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2000년 전 고난과 수치의 칼바람 속에서 십자가라는 차가운 벤치가 되어주신 주님을 위해 이 부족한 종의 온기를 더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4. 서로의 벤치가 되어, 서로의 온기가 되어...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면 좋을까요? 저는 2014년 추수감사주일에 이것 하나를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결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초대교회는 서로에게 쉼이 되고 온기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서로에게 냉기가 되고 서로를 외면할까요? 저는 먼저 우리 교회가 지역 사회와 이웃에 대하여 우리 주님이 준비하신 벤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역할을 감당하기로 결단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서로에 대해서도 벤치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를 기대어 쉴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에 대해서도.... 스스로 우리의 쉼터가 되신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고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서로에 대해서 온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뭐 저래... 직분자가 뭐 저래...예수 믿는 사람이 뭐 저래... 때로 벤치로 헌신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 비판하고 비난하고 자리를 떨쳐 일어나는 교회와 성도가 아니라 오히려 옆에 있어서 따뜻한 온기를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상처 많은 자리에 따뜻한 사랑으로 앉아서 어려운 때가 지나가기를 함께 기다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의 곳곳에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예를 들어 살전 5:25에서는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빨리 자신에게로 오라고 독촉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쓰면서도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골 4:3) 히브리서의 기자도 같은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히 13:18) 바울에게 지중해 연안의 교회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그 교회들에 대해 바울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세상에 대해 교회들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분명한 것은 그들은 모두 주님이 세상이 허락하신 벤치이면서 또한 다른 벤치들에 기대어 쉬고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관계가 우리들의 관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서로 기댈 수 있고,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고...연약함에 대해 판단받거나 정죄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온기로 서로를 데워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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