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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30 기도 - 1.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na kim 201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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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45109

설교 영상은 이곳을 클릭해 주세요.

http://vimeo.com/chodaepa/2014-11-30

 

본 문 : 누가복음 111-13절 말씀

제 목 : 기도 1.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이번 주부터 10주간 저희 교회 포도나무에서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성경 공부를 합니다. 각 소그룹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왜 기도가 성경 공부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신 분은 없습니까? 기도는 이전부터 늘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인데... 왜 꼭 성경 공부를 통해서 기도를 배워야 하나...라고 생각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꼭 이번 성경 공부에 지원하셔서 참석해보시기 바랍니다. 10주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답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기도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까요? 아마 지금 제가 드린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 속에만 있는 문제는 아닌가 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선택하신 12명의 제자들도 동일한 고민과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기도를 가르쳐주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하지 않거나 못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도했습니다. 1세기 당시의 전통에 의하면 그들은 하루에 세 번 이상, 성전이나 회당, 거리에서나 집에서 기도했습니다. 특정한 기도문의 양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자신의 임의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언급하신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유대주의적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를 마23: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여 옷 술을 크게 하고.”(23:5) 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 시간이 되면 마치 일이 있는 것처럼 시장이나 성문에 나갑니다. 그리고 기도 시간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예루살렘성에 울려 퍼지면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서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들리는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로 자신의 경건과 의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사두개파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와 바리새인들의 자기과시적인 기도를 인정하지 않는 또 다른 무리가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사모하던 엣세네파, 즉 경건주의 운동을 하던 무리들입니다. 세례 요한 또한 엣세네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는 무엇인가 다른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하던 것과 비슷한 메시지를 담아서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선포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자기 의와 경건이 아닌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며,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1.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그들 또한 형식적이고 자기과시적인 기도가 아닌 뭔가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는 기도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은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입니다. 찬송가나 성경 표지 안쪽을 펴시고 한번 천천히 같이 읽어볼까요? (주기도문)

 

,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끝난 것일까요? 이제 제자들은 부지런히 이 기도를 암송하고 드리면 되는 것일까요? 주기도문에 대한 오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이 주기도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모든 모임에서나 예배에서나 기도가 막히거나 답답하면 이 기도를 사용합니다. 그 결과 칼빈은 주기도문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순교당하는 기도문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한 내용대로 성도와 교회가 살지 못한다는 고백이겠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셨는지를 알고 싶다면 먼저 제자들의 질문의 배경을 생각해 보시고,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과정을 좀 큰 눈으로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은 기도란 무엇이고, 무엇은 기도가 아니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기도하면 안되는지를 아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2.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

 

얼마 전에 만난 부부는 다소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통 부족이었습니다. 여자 분은 자기 의견이 분명하고 말을 잘 하는 편입니다. 상담을 할 때도 저의 눈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도전적으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남자 분은 표현이 부족하고 가끔 말을 할 때 흘려서 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때도 먼저 시선을 저의 대각으로 잡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고 대답을 기다리다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서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제게 하는 중요한 모든 말들은 제가 꼭 ?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라고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절반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대답을 끝냅니다. 한쪽은 소통의 에너지가 지나치게 넘치고 다른 한쪽은 소통의 에너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에 들리지 않는 일방적인 말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에너지 넘치게 이야기를 쏟아낼 때 남편은 아내를 보지 않습니다. 당연히 아내는 더 크게 말합니다. 남편은 아예 아내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지 비난하고 거절할 것을 알기 때문에 작게, 대충 말을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을 하고 있지만 서로가 듣지 않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이야기하지만 결국 혼자 말하고 있습니다.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후 다음과 같은 기도에 대한 비유를 주십니다. 본문 5절부터 8절까지는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18:1-8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와 맞물려 있습니다. 18: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18:1) 즉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가난한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으려는 불의한 재판관을 놓고 말씀하고 있고, 본문에서는 밤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친구를 거절하려는 다른 친구를 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11:8)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결정적으로 11:9-10에서 이렇게 해석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11:9-10)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같은 의미의 말씀을 세 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뭘까요? ,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기도를 했을까요? 하지 않았을까요? 설명 드린 대로 그들은 하루에 세 번 나팔을 울리면서 기도했고, 매일 먹고 자고 입고 생활하는 모든 일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부부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기도

 

한 밤 중에 찾아온 친구비유와 불의한 재판관비유는 잘못 해석하기 쉽습니다. 이 비유를 근거로 강청기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떼를 쓰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정도 없는 친구, 혹은 불의한 재판관과 같이 우리의 기도를 일부터 듣지 않으시고 애태우시는 분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의도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결과입니다.

 

한 밤 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에서 친구는 누구의 문을 두드립니까? 자신이 떡을 구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누구의 문을 두드립니까?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해결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재판관입니다. 그들의 요구는 합당하고 그 요구를 하는 대상 또한 정확합니다. 그들은 친구와 재판관이 집에 찾아가서 정확하게 그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만일 친구가 떡을 구하러 가면서 그 친구의 집이 아닌 이웃집의 문을 두드렸다고 합시다. 떡을 얻을 수 있을까요? 가난한 과부가 재판관의 집이 아닌 옆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자신의 송사를 해결해달라고 하면 해결될까요? 만일 그들이 친구의 집, 혹은 재판관의 집을 정확하게 두드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원칙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누구에게 드리는 것일까요? ,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하고 기도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라고 질문하실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32:4) 금송아지를 놓고 그들은 춤추며 노래하며 제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른 집의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면, 그래서 나의 강력한 소원을 아뢰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들리는 기도,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두드리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세상 사람들이 각자의 종교와 신앙으로 드리는 기도와 달라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달라야 하고 제사장들의 기도와 달라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율법과 전통이라는 또 다른 집을 세우고 그 문을 두드렸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오랜 가난과 식민의 생활에 지친 나머지 좀 잘 살고 싶고, 풍요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물질의 집에 든든히 세워져 있었고, 그들은 그 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6:13)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의 문을 정확하게 두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 안에 세워놓은 내 소원의 집, 내 아집의 집, 내 성격의 집, 내 자존심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4. 하나님이 음성을 듣는 기도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한번 보실까요? 다음과 같습니다.

 

1/ 제자들의 요청 -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2-4/ 예수님의 대답 1) 기도의 내용 : 주기도문

5~8/ 예수님의 대답 2) 기도의 대상 : “하나님께 기도하라!”

9~10/ 예수님의 대답 3) 기도의 태도 : 간절하게 기도하라.

11~13/ 예수님의 대답 4) .....?

, 11-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기도에 대한 어떤 대답을 주실까요? 이번 기도라는 성경 공부 교제를 보면 첫날 공부에 기도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대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기도라는 형식의 대화를 합니다. , 그렇다면.... 대화란 일방적입니까? 쌍방향의 소통입니까? , 대화는 쌍방향의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잠시 왔다가 사라질 우리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시고 주장하시지 않고 쌍방향의 소통을 하자고 제안하신 것입니다. 쌍방향의 소통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소원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협상을 하기도 하시고,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15년의 생명을 더 주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귀로 들으시고 마음으로 반응하시는 분입니다.

 

반대로 우리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기도의 제목과 삶의 모습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소통은 어떻게 일어나야 한다고 했습니까? 쌍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기도이며,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11-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마치 자녀들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부족한 우리들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 주기를 소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에 가장 좋은 대답을 주십니다. 그 대답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마태복음 7:11의 병행구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라고 했고, 본문에서는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가장 아름답고 선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성령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의 마지막에 늘 함께 하는 축도를 기억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삼위 하나님의 축복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들에게 보내셔서 우리와 교통, 즉 대화하고 소통하십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내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Counselor가 되시는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주셔서 세상 속에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셨고, 성령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기도, 즉 하나님과의 소통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내 마음과 생각이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기도로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고, 하나님을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고... 그런 것이 능력있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에 성공한 좋은 기도의 열매는 바로 내 마음의 생각을 성령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13절을 요약하면 무엇일까요?

 

1/ 제자들의 요청 -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2-4/ 예수님의 대답 1) 기도의 내용 : 주기도문

5~8/ 예수님의 대답 2) 기도의 대상 : “하나님께 기도하라!”

9~10/ 예수님의 대답 3) 기도의 태도 : 간절하게 기도하라.

11~13/ 예수님의 대답 4) 가장 좋은 기도의 응답 : 성령

 

성도 여러분! 살아갈수록 결국 기도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삶을 주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입니다. 그래서 더욱 성령입니다. 성도와 교회를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교회와 가정과 삶에 늘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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